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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포엠]

나는 부스러기를 사랑한다

무제

Ⓒ 김수길

나는 부스러기를 사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수업 시간
선생님 몰래 처음 읽었던 시 한 편은
내 말투를 바꾸어놓고 말았네
시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몰랐던 시절이지만
어느 버팀목에서 튕겨져 나온 부스러기처럼
몇 글자 안 되었지만
이제 나는 분명히 알고 있네
사랑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부스러기 같을지도 모르지만
간절함으로 하는 것이란 것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나는 누군가의 사랑 얘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우주의 위대한 부스러기 같던
그 구절들을
떠올릴 텐데, 아니 세상의 한 복판을 떠올릴 텐데
허름한 겨울이 잠들어 있는
골목 귀퉁이, 낡은 술집 여주인이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면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구절들을
속삭이듯, 노래하듯 읊고 말리니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그 황홀한 세상을 당신은 읽어본 적 있는가,
‘사랑해서 눈은 푹푹‘ 내린다니! 얼마만큼의 가난은
하늘에 내리는 눈발을 간절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 비문(非文)의 문장이 어째서, 어째서 시가 되고,
음악이 될 수 있는가, 그 기막힌 상상력에
몸을 은근히 맡기고 술잔을 들이키면
사랑이 젖어가는 소리 흐린 조명 아래 흥건히 깔리리라

그리하여 눈 내리는 겨울밤마다 나는,
어리석은 내가 아름다운 너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펑펑 운다, 라고 쓰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내가 아름다운 너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너를 보낸다, 라고 쓰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너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별들이 빛난다, 라고 쓰거나
아무리 읊어보고, 흉내 내고, 질투를 해봐도
우주만큼 넓고 큰 그 사랑을 티눈 같은 내가 알아챌 수 없으므로
나는 차라리 부스러기 같은 내 사랑을 아주 사랑하기로 하였네
세상과 우주의 중심에서 내리는 눈이여,
사랑의 부스러기 같은 눈이여,
그리 중얼거리며 끝내는 다시 말더듬이처럼
읊을 수밖에 없으리라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내 버팀목으로 서 있는 그 노래들을.

* 백석(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시 | 오형석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공동시집으로 <백악이 기억하는 시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