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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in가요]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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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 방송사에서 주최한 ‘최고의 록&밴드 아티스트’ 투표에서 국내 음악전문가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최고의 아티스트로 신중현을 첫손에 꼽았다. 신중현은 이번 투표에서 ‘록&밴드 아티스트 20인’으로 함께 선정된 김현식, 들국화, 백두산, 부활, 사랑과 평화, 산울림, 서태지와 아이들, 송골매, 시나위, 조용필, YB 등 쟁쟁한 후배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맨 윗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1958년 첫 공식 앨범 ‘히키 신’으로 일반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한국 록의 원형을 완성시켜온 신중현을 빼고 한국의 대중가요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미8군 무대가 낳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이자 1963년 국내 최초의 록밴드인 ‘애드 포(Add 4)’를 선보이기도 했던 신중현이야 말로 <미인>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아름다운 강산> 등 당시 국내 음악환경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새롭고 전위적인 사운드로 대한민국 록 음악을 태동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룹 활동과는 별개로 60~70년대 작곡&프로듀서로서 로큰롤 특유의 리듬에 한국적 정서를 결합한 신중현의 한국적 록 사운드는 최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케이팝(K-POP)’의 원류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성장기의 지독한 가난과 불행한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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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와 함께 미8군 무대의 최고 스타로 떠오른 신중현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였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록을 ‘저항의 음악’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신중현이야 말로 일생 동안 가장 부단하고 격렬하게 기성의 권위와 형식에 저항해온 아티스트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트로트와 신민요가 전부였던 1950년대, 이름도 생소한 영미권 음악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지금처럼 세련된 국내 대중가요의 초석을 놓은 이가 바로 이 한 사람의 ‘작은 거인’이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분명 성큼성큼 시대를 앞서 걸어온 천재(天才)였다. 동시대인의 질투와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국내 가요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이 천재 아티스트의 경이로운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한국의 대중음악 역사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시대와의 불화’를 마다하지 않고 한 평생 록 음악에 집작해온 신중현의 외고집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신중현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경험한 범상치 않은 유년기부터 훑어보아야 한다.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난 신중현은 그 당시 모두가 선망하던 전문직종인 이발사 아버지를 둔 덕택에 매우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중현이 네다섯 살 될 무렵, 부친 신익균은 일제의 간섭을 피해 일가족을 데리고 만주 신경(新京)으로 이주해 그곳에서도 4층짜리 이발소를 세울 만큼 큰돈을 모았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그의 가족들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따발총을 들이대며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강탈해가는 소련군을 피해 귀국 열차에 오른 가족들은 열흘 남짓한 귀국길에서 몸에 지니고 온 금붙이마저 모두 빼앗기고 맨몸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발소 덕분에 몇 년 만에 다시 가세를 일으킨 것도 잠시, 그가 강남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친척을 통해 미리 적지 않은 땅을 사두었던 아버지의 고향 충북 진천으로 피난을 갔지만 일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가난과 배고픔이었다. 재산을 맡아 관리하던 고모가 쌀 한톨 내놓지 않고 안면을 바꾸자 일가족은 당장 끼니를 때울 길조차 막막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굶기를 밥 먹 듯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배추밭에서 시래기 조각을 걷어 와 죽을 끓여 먹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밀기울을 빻아 물과 함께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억지로 삼켰다. 자존심 강한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누이에게 재산을 돌려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록 음악의 정신은 기성의 권위에 대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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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부친 신익균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한겨울 차디찬 냉방에서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다. 매정한 고모는 아버지의 장례를 부탁하러온 어린 조카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몸져누워 있던 어머니 대신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꽁꽁 언 동네 뒷산에 관도 없이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린 여동생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곡물 한 알 넘길 기운이 없어 뱉어내기만 하던 어린 여동생이 안쓰러워 신중현이 입 속에 음식을 넣어 잘게 씹은 뒤 입에 넣어보기도 했지만 영양실조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어린 육신은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1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다. 하나 남은 동생과 어머니를 맨땅에 묻던 그날을 신중현은 평생 잊지 못한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친척 아저씨가 도와주어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 그 날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지나가던 이상한 날이었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믿었던 친족의 배신과 그로 인해 풍비박산이 된 불운한 유년기는 이후 신중현에게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훗날 신중현은 한 인터뷰에서 “내 록의 저항성과 공격성의 뿌리는 어릴 때 겪었던 극심한 가난일지도 모른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음악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1970년대 초반 자신이 발굴해 데뷔시킨 가수 장현이 <나는 너를> <기다려주오> <미련> 등으로 큰 인기를 얻은 뒤 말도 없이 곁을 떠나자 평소 좀처럼 속내를 내지 않는 신중현이 불같이 화를 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중현 사단’으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했던 다른 가수들과 달리 신중현은 끝내 장현과 화해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여윈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먼 친척이 운영하던 ‘상수제약’이란 약방에서 점원생활을 하던 신중현에게 유일한 낙은 판자쪼가리에 군용 전화선을 걸어 만든 기타로 AFKN에서 흘러나오는 미국 음악을 흉내 내는 것뿐이었다. 밤마다 독학으로 익힌 기타 실력을 밑천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친척집을 나와 종로의 기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1955년 한 교습생의 주선으로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현란한 연주력과 쇼맨십을 갖춘 신중현은 데뷔와 함께 곧 미8군 무대의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미8군 무대의 슈퍼스타, 기타 독주로 명성

신중현의 첫 월급은 당시 쌀 한가마 값인 3천원이었지만 기타 연주를 눈여겨본 다른 쇼단들의 스카우트 경쟁 덕에 석 달 후 7천원으로 수직 상승했고 다시 일주일 만에 2만원으로 인상됐다. 쇼단으로서는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꼭 데리고 있어야 할 특급 연주자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신중현 특유의 기타 테크닉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3-3 주법’이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세 손가락만으로 6개의 기타 줄을 옮겨 다니는 고난도 주법으로 손가락의 활용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혀 경쾌하고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어 낸다. 대신 이 주법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손가락의 움직임이 정교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기타리스트들도 따라 하기 힘든 테크닉이다. 그 당시 미8군에서 신중현의 신들린 기타 연주가 시작되면 본토에서부터 음악을 하던 미군 연주자들까지도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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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발매된 국내 최초의 록밴드인 ‘애드 포(Add 4)’의 앨범 자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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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포는 로큰롤과 사이키델릭 록을 기반으로 일반 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열화와 같은 환호에 쇼 타임 중간에 이례적으로 기타 독주를 편성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신중현은 곧 어린 나이에 밴드 마스터로 승진해 무대를 이끌었다. 밴드 마스터의 역할은 오케스트라의 악단장과 비슷했다. AFKN에서 녹음한 영미 팝송의 악보를 채보하고 악기에 맞춰 편곡을 하는 것은 물론 밴드의 공연스케줄 구성, 수익의 배분 등이 모두 마스터의 역할이었다.

이 당시 신중현의 수익금 배분방식은 다른 밴드와는 사뭇 달랐다. 통상적으로 밴드들은 멤버 수에 1을 더한 값으로 전체 수익을 나눠갖는 게 불문율이었다. 즉 밴드 멤버가 7명이라면 총수익을 8로 나눈 뒤 마스터가 그 중 2를 갖고 나머지 멤버들이 각자 1씩을 갖는 방식이다. 하지만 신중현은 마스터 몫을 따로 제하지 않고 다른 멤버들과 똑같이 수익을 나눴다. 대신 멤버들은 신중현이 요청이 있을 때면 휴일이라도 사무실에 나와 곡을 연습하거나 녹음작업을 돕는 것으로 이를 보충했다. 음악에 대해서라면 타협을 몰랐던 신중현의 연습량은 멤버들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

그 덕분인지 신중현은 거의 모든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 멤버들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80년대 국내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구성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이태현조차 그룹 덩키스(1968~1969) 시절 ‘우리 밴드에 들어오면 연주를 더 가르쳐주겠다’는 신중현의 말에 혹해 합류했을 정도로 신중현의 악기 다루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독한 연습과 실험정신으로 ‘한국적 록’ 개척

악기 연주야 무대 활동 틈틈이 배웠다 하더라도 60년대 중후반부터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그는 대체 어디서 음악 이론을 배웠던 것일까. 그의 음악스승은 당시 대방동 해군본부에서 군악대를 지휘하고 있던 이교숙이었다. 뒷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기도 한 이교숙은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의 재즈학교를 졸업한 재원으로 신중현이 소속돼 있던 화양흥업의 요청으로 미8군 연주곡들의 편곡 강의를 맡고 있었다. 신중현은 이교숙으로부터 1962년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 3년에 걸쳐 화성악, 대위법 등 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원래 2년 과정이었던 공부가 3년으로 늘어난 것은 어이없는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가 탄 만원버스가 홍제동 고개에서 미끄러져 2m 아래 개천으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아수라장이 된 버스 속에서 빠져 나온 그의 오른손목은 완전히 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경황에도 어떻게든 기타를 쳐야 한다는 생각에 신중현은 팔을 잡아 당겨 대충 뼈를 맞추고는 병원으로 달려가 석고 깁스를 했다. 

40일 후 병원에서 깁스를 풀었더니 이번에는 팔이 삐딱하게 붙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 길로 달려간 사대문 접골원의 말은 한술 더 떴다. 잘못된 팔을 부러뜨려 다시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유도 선수들이 달려들어 허벅지에 대고 팔을 부러뜨린 뒤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 그리고도 팔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신중현은 깁스한 팔로 2주 만에 이교숙을 찾아갔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음악 이론을 공부하던 신중현에게 ‘자기 음악’에 대한 갈망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미8군 생활을 5년 정도 했을 때 베트남전이 터져 주한 미군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미군부대 쇼도 시들해졌다. 이 시기 신중현이 미8군 생활을 접은 건 단순히 그 이유뿐만 아니라 ‘늘 외국곡을 그대로 따라 연주하고 부르는’ 미8군 무대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외국 것을 그대로 따라하기 보다는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 가던 때였다.

남진, 나훈아가 전성기를 누리던 트로트 일변도의 가요계에 야심차게 내놓은 신중현의 출사표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인 ‘애드 포(Add 4, 1963년)’였다. 신중현(퍼스트기타&보컬), 서정길(리듬기타&보컬), 한영현(베이스), 조용남(드럼)으로 구성된 애드포는 미8군 무대를 통해 체화된 로큰롤과 사이키델릭 록을 기반으로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발표 시 곡명은 ‘내 속을 태우는구려’) 등을 통해 일반 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팝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도 불과 1년 전인 1962년 비틀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노래하는 밴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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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호가들에게 희대의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는 ‘신중현과 엽전들(1974)’의 앨범 자켓

시대를 앞서간 이 비운의 데뷔 앨범은 상업적으로는 실패를 거두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신중현은 ‘조커스(Jokers,1966년)’, ‘덩키스(Donkies,1969년)’, ‘퀘스천스(Questions,1970년)’, ‘더맨(Tne Man,1972년)’,  ‘신중현과 엽전들(1974년)’, ‘뮤직파워(1980년)’, ‘세 나그네(1983년)’ 등의 밴드 활동을 통해 한국 가요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이 기간 중 그는 작곡&프로듀서로서도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글 | 김정현(카페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