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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시네마] 영화 <오리지널 씬>에서 만난 커피

“사랑이란 모든 걸 다 주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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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리지널 씬> 포스터

할리우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팬이라면 아직도 2001년 상영작인 영화 <오리지널 씬 (Original sin)>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이클 크리스토퍼 감독이 연출한 이 스릴러 멜로는 당시 평단으로부터 ‘히치콕을 흉내 내려다 싸구려 케이블 TV의 드라마로 끝나고 말았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안젤리나 졸리에게 진정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영화로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19세기말 쿠바 커피농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개봉 전부터 세기의 섹스심볼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안젤리나 졸리의 배드신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의 배경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인 19세기 말의 식민지 쿠바(CUBA)다. 부유한 커피농장주인 루이스(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정체를 숨긴 채 그와 결혼한 미지의 여인 줄리아(안젤리나 졸리)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쿠바는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며 커피 수출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그 화려한 시절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쿠바의 모든 커피나무가 허리케인에 뽑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루이스의 완벽한 결혼생활은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뭔가 불순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커피를 전혀 마시지 못한다던 그녀가 실은 눈 뜨자마자 커피를 찾는 애호가이며, 정숙한 가정주부에게서 가끔 남자들이나 피울 법한 거친 시가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거액의 돈과 함께 종적을 감춘 줄리아로 인해 그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루이스는 사라진 줄리아의 행방을 쫒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아내가 줄리아란 이름을 가진 여염의 여인이 아니라 잔인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란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껏 자신의 사랑을 기만해온 그녀에게 잔인한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줄리아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고용한 사설탐정 보니(줄리아 러셀)마저 실은 곤경에 빠진 줄리아를 협박해 이 모든 계략을 꾸며낸 진짜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녀의 엇갈린 선택에 초점을 맞춘다. 
 
줄리아의 흔적을 더듬어 온 루이스는 결국 매음굴에 숨어있던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녀를 향한 분노가 실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그녀에게 새출발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그녀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니의 강압에 못 이겨 루이스에게 독약이 든 커피를 건네고 만다. 
줄리아가 뒤늦게 자신에 대한 루이스의 진심을 깨닫고 후회와 불안으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그 장면에서, 관객들은 아마도 ‘커피’가 가진 본질의 쓴맛을 떠올렸을 것이다. 또 그녀가 건넨 커피 속에 독이 들어있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잔을 들어 올리던 루이스의 그 슬픈 눈빛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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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커피수출로 부를 축적했던 황금의 땅

인구 1,100만 여명 남짓의 작은 섬나라인 쿠바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말 이미 전국에 약 2,000여 개의 커피농장이 존재할 만큼 커피 수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황금의 땅이었다. 극중 루이스처럼 전국에 산재한 커피농장의 주인들은 거의 대부분 모국인 스페인이나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는데, 커피 무역을 통한 이익은 산업혁명이 거의 완료된 유럽의 상공인들도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커피애호가들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에 버금가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는 ‘크리스탈 마운틴’이 명성을 떨치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화에서 자세히 소개되지는 않지만, 루이스 역시 스페인에 해마다 적지 않은 커피를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큰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쿠바에 처음 커피가 전해진 것은 영화의 배경보다 15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748년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아이티 혁명을 피해 쿠바로 건너온 프랑스인들에 의해 본격적인 경작이 시작되는데 이미 1790년 한 해에 모국인 스페인에 1만 톤의 커피를 수출할 만큼 커피는 식민지 쿠바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산업이었다. 쿠바가 이렇듯 커피 수출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카리브해의 덥고 건조한 기후와 적당한 강우량, 화산지대의 비옥한 토양과 고지대의 심한 일교차 등 커피 재배에 적당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바는 연평균 기온이 여름 25℃, 겨울에도 21℃를 넘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평균 강우량도 연 140mm∼180mm에 불과해 커피재배에 더없이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동부의 나이프 바라코아(Nipe Baracoa)는 전체 커피생산량의 85%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곳이며, 중부의 에스캄브레이(Escambray)가 10%, 서부의 시에라 델 로사리오(Sierra del Rosario) 등이 5%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곳은 모두 해발 300∼600m의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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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쿠바 하바나 항구에서 커피를 배에 싣는 모습. by Boston Public Library, flicker (CC BY)

쿠바 명품 커피, ‘크리스탈 마운틴’

쿠바 커피는 전체적으로 산도가 적은 편이며, 이 때문에 신맛이 덜하지만 그만큼 위장에 주는 부담이 적어 속 쓰림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쿠바산 커피 중 가장 유명한 ‘크리스탈 마운틴’ 역시 신맛과 쓴맛의 조화가 잘되어 마실 때 달콤한 여운을 남겨주며, 향이 순하기 때문에 지금도 질 좋은 모카와 블렌딩해 즐기려는 커피애호가들에게는 중요한 수집목록 가운데 하나이다. 크리스탈 마운틴은 재배지인 중부지역의 크리스탈 산(Crystal Mauntain)의 이름이 브랜드명으로 굳어진 것인데,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이 훗날 쿠바로 전파되면서 현지의 기후와 토양에 맞춰 개량된 종자라고 한다. 

쿠바의 커피 역사는 <오리지널 씬>의 시대적 배경이 된 19세기 말을 이후로 급격한 부침을 겪게 된다. 머지않아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쿠바의 독립전쟁이 일어나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극심한 허리케인까지 겹쳐 한때 2,000여 개를 넘던 커피농장이 190여 개로 급감했던 것이다.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쿠바는 정부 주도에 따라 불모지가 된 커피농장 재건에 나서는데 이때 대대적인 품종 개량과 재배농법의 개선이 이뤄졌다. 쿠바의 주요 생산품이었던 커피는 1956년까지 해마다 약 2만 톤이 해외로 수출될 만큼 번성기를 구가했지만, 1956년 쿠바혁명이 일어나면서 국영화된 쿠바의 커피 산업은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미국에 의해 주도된 끈질긴 무역봉쇄정책 때문이었다. 

급격한 부침, 유기농 커피로 도약

서구의 무역봉쇄로 화학비료의 공급이 중단되자 쿠바는 그 대안으로 1960년대부터 유기농 커피재배를 국가적 과제로 삼아 지렁이, 곰팡이, 박테리아 등과 퇴비를 이용한 친환경농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카스트로의 지시에 의해 전세계로부터 약 600여 종의 지렁이를 들여와 친환경 재배에 박차를 가한 결과, 현재 쿠바는 수확량은 많지 않지만 환경운동가와 생태연구가들이 첫손에 꼽는 세계적인 유기농(Organic)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쿠바의 유기농 커피재배는 규모에 따라 영세 농민이 경작하는 소규모 농장과 정부가 운영하는 대규모의 농장으로 이원화되어 있는데, 토양과 기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각기 다른 고품질의 커피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쿠바 커피는 여전히 국가의 가장 중요한 1차 산업이며 부드럽고 마일드한 품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커피의 대량 소비국인 서구 수출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지금, 커피산업 역시 과거와 같은 활력을 잃은 지는 오래 전의 일이다. 그 사이 전체 생산량은 연간 약 8,000톤 정도로 줄어들었고, 현재는 이 가운데 5,000톤 정도를 수출하는데 그치고 있다.

쿠바의 커피 등급은 다른 국가와는 명칭이 좀 다른 편인데 최고 등급인 엑스트라 터퀴노(Extra Turquino)부터 터퀴노(Turquino), 알투라(Altura), 몬타나(Montana), 쿰브레(Cumbre), 세라노 수프리어(Serrano superior), 세라노 커니에테(Serrano corniete), 카라콜리로(Caracolillo, oval shape) 순으로 나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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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ffeeDetective, flicker (CC BY)

한 알의 작은 커피열매처럼

영화 <오리지널 씬>은 어쩌면 그런 쿠바 커피 산업의 신산한 운명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고아원에서 겪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던 줄리아가 자신을 위해 기꺼이 독이 든 커피를 마시고 죽음을 택하려 한 루이스를 통해 비로소 그 진실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쿠바 커피 역시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후에야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확인했으니 말이다. 

결국 줄리아는 루이스를 살리기 위해 지금껏 자신을 조정해온 보니를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갇히고, 사형전날 밤 한 신부에게 루이스의 헌신적인 사랑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구원이었는지를 참회의 눈물로 고백한다. 그리고 그들의 엇갈린 사랑이야 말로 신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신부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와 어두운 거리 저편으로 총총히 사라져 간다.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들은 극의 중반부, 사라진 줄리아를 다시 만나게 된 루이스가 남녀의 사랑은 한낱 부질없는 잠깐의 욕정일 뿐이라 항변하는 줄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랑의 의미를 설명하던 장면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욕정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은 소유욕이라면, 사랑이란 반대로 내가 가진 모든 걸 기꺼이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오.”

어쩌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작은 나무열매가 어떻게 인류에게 최고의 행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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