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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음료기행] 차이 Chai

인도 민중들의 ‘Tea Break’

[음료기행] 차이 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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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색깔이 밀크커피와 비슷하다.

차이(Chai가 무슨 음료인지 금방 떠올리셨나요? 예, 차(茶)입니다. 그런데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끓여서 먹는 차입니다. 홍차, 우유, 인도 향신료(계피, 정향, 카다멈 등)를 넣고 팔팔 끓입니다. 향신료가 들어간 차라고 해서 ‘마살라 차이(Masala chai)’라고도 하죠.

이렇게 끓여낸 차의 색깔은 밀크티, 로얄 밀크티와 비슷해요. 그러고 보니 인스턴트 커피믹스와도 비슷하네요. 밀크티가 우려낸 홍차에 데운 우유를 섞는 거라면, 로얄 밀크티는 찻잎과 우유를 함께 넣고 끓인 겁니다. 향신료가 들어가지 않을 뿐 차이랑 비슷하죠.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찻잎에 있습니다. 차이는 인도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로서 여기에 들어가는 찻잎은 ‘더스트 티(dust tea)’이거든요. 말 그대로 먼저처럼 흩날릴 정도로 질이 낮죠. 여기에는 암울했던 인도 근현대사가 스며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에 차나무 대량 경작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기 전까지 인도인들은 차를 의약용으로 사용했고, 일상적으로 즐겨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인도 동북부 히말라야 산맥 부근에 차나무가 자생했고, 대표적인 곳이 아삼이죠. 자생 차였으니 생산량도 많지 않았습니다.

인도에 차가 대량 경작되기 시작한 건 1830년대. 당시 영국에는 홍차 수요가 급증했고,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를 손아귀에 넣고 있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아삼 지방에 자생하는 차 나무를 발견했고, 이를 대규모로 재배합니다. 물론 실제 나무 심고 찻잎 따는 일은 인도인의 몫이었지요.

차나무가 대량으로 경작되면서 18세기 중반 이후 인도는 본격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100년 이상 인도에 똬리를 틀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식민지배의 교두보였던 셈입니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동인도에 설립한 회사를 말합니다. 1600년 영국을 필두로 1602년 네덜란드, 1616년 덴마크, 1664년 프랑스, 1731년 스웨덴 등이 각각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음료로서 인도 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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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급증하는 홍차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세기 초반 인도에 차나무를 대량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차 생산량은 날로 늘었고, 급기야 19세기 말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차 생산국이 되었어요. 영국에서 소비되는 차의 90% 이상이 중국산이었지만 이즈음 중국산은 10%로 낮아지고 인도산이 50%, 스리랑카산이 33%를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인도 차에 열광했지요.

차를 재배한 것은 인도인이었지만 이를 즐기는 것은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러다 인도인들도 차 맛에 길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도 영국인의 장삿속이 보입니다. 20세기 초 영국인들로 구성된 인도차협회가 인도 차 내수시장을 키우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캠페인을 펼칩니다. 영국인 소유의 공장, 광산의 인도 노동자들에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을 주도록 독려했죠. 일명 ‘Tea Break’이죠. 고된 노동 중에 차를 마신다는 것은 휴식을 뜻했죠. 뭔들 맛있지 않았을까요. 땀으로 젖어있어도 훅훅 불어가며 마시는 차 한 잔의 맛은 꿀맛이었겠죠.

‘차이 왈라’라는 차이 노점상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왈라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인도말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꾼, 장이’가 되겠죠. 인력거꾼은 ‘릭샤 왈라’, 세탁일꾼은 ‘도비 왈라’라 부릅니다. 당시 찻잎의 가격은 비싼 편이어서 차이 왈라들은 찻잎의 양을 최소로 하는 대신 괜찮은 맛을 내기 위해 향신료를 첨가했고, 우유와 설탕의 양을 늘렸지요. 우유가 들어가 깔끔한 맛은 덜해도 부드럽고 묵직한 맛이 좋았을 겁니다. 노동으로 비워진 속을 채워주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인도차협회는 속이 편할 리 없었습니다. 찻잎의 소비는 크게 늘지 않고 차이 소비만 늘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영국 고용주들이 인도 노동자들이 홍차를 사먹을 수 있도록 급여를 많이 줄 리도 만무하니. 인도인들은 그들의 형편에 맞게 자신만의 음료를 만들어낸 겁니다. 자신들이 흘린 땀의 결과물을 모두 빼앗겼지만 차이를 마시며 독립의 열망을 키워갔을 겁니다.

타고르의 고향, 산티니케탄의 노천카페

주요 차 재배지인 동인도 지역은 유럽 각국의 동인도 회사가 각축을 벌였고 인도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콜카타(구 캘커타)는 서벵골의 중심이자 인도 독립운동의 진원지였죠. 대표적인 인도독립운동가로 인도의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가 있습니다. 그는 인도의 오랜 관습이었던 카스트 신분제도를 비판하면서 농촌재건과 교육운동을 펼쳤습니다.

타고르는 1901년 서벵골주 북서쪽 산티니케탄 지역에 ‘아쉬람(수행공동체)’을 세우고 실험적인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교실이 아닌 나무 아래에서 수업을 하는 등 현대교육방식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방식을 따르지요. 핵심 교육철학은 경쟁이 아니라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지는 삶입니다. 지금도 이 교수법은 유지되고 있고, 이곳을 소개하는 방송과 신문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타고르는 또 농촌공동체 ‘아마르 꾸띠르’를 만듭니다. 카스트 제도와 빈부격차를 타파하기 위한 실천이었습니다.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수공예품 공방을 세웠고, 이는 이후 주민들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죠. 타고르가 뿌린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나무 아래에서 주민, 관광객, 유학생들이 더위를 식힙니다. 이럴 때 차이 한 잔이 빠질 수 없겠죠.

시인 곽재구가 존경하는 시인 타고르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와 540일간 머물며 쓴 <우리가 사랑한 1초들>에는 산티니케탄 노천카페의 풍광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름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정전 때문에 집은 한증막이고 천장의 팬은 멈춥니다. 유학생들은 저녁 한나절을 이곳 라딴빨리(산티니케탄 중심가)의 노천카페들에서 보내다 늦은 시각 전기가 들어오면 집으로 향하지요. 내가 라딴빨리의 노천카페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손님들 중 상당수가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고 낡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코스모폴리턴의 마을입니다.”

노천카페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모깃불 연기, 차이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죠. 1초의 짧은 순간마저 감사하게 합니다.

차 배달 청년 ‘차이 왈라’의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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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왈라 ‘자말’의 사랑과 인생역전을 다룬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관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헌법이 있어도 신분제는 인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죠. 특별한 정변이 일어나거나 개인적 능력이 매우 뛰어나지 않다면 넘을 수 없는 벽.

신분제가 유지되면 빈부격차는 좁혀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개발 바람이 더해지면 더욱 커지기 마련이죠. 인도 서북부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는 인도 경제발전의 이면과 인생역전을 향한 인도 서민들의 열망을 보여줍니다.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자말은 200만 루피(약 6억원)가 걸린 백만장자 퀴즈쇼에 출연해 최종 단계까지 오릅니다. 단계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부럽기도 하고, 자기의 열망을 대신 이뤄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죠.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못마땅해 합니다. 통신회사 보조원이라지만 주된 업무는 직원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차이 왈라였던 자말이 무슨 수로 최종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를 의심하죠. 이건 사기야. 퀴즈쇼 사회자는 경찰에 고발하고, 자말은 고문을 당합니다. 너 같은 빈민가 출신의 고아 녀석이 이런 문제를 맞힐 수가 없어. 빨리 자백해!

전기고문에 기절했던 자말이 깨어나 사실을 말합니다. 문제는 모두 내가 아는 것들이었다고. 누구나 뚜렷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죠. 퀴즈의 문제들은 자말에게 전환점이 되었던 순간들마다 듣고 보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맞출 수밖에.

자말이 빨래꾼(도비 왈라)이었던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어 지냈던 10여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생사의 고비도 많았죠. 어릴 적 여자 친구 라티카와의 애끓는 이별도 있었고요. 훗날 만난 라티카는 조폭 두목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21세기에도 카스트 제도가 여전함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형사는 자말이 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곤 배달된 차이를 마실 것을 권합니다. 자말은 풀려나고 마지막 문제도 맞춥니다. 시청자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라티카도 다시 만납니다.

인도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파는 차이 한 잔쯤은 마셔봤을 겁니다. 45도를 웃도는 더위에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게 내키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차이를 마시고 난 후의 후련함이란. 이열치열이죠. 맛도 생각보다 괜찮았을 겁니다.

길거리 차이 판매점 앞에 수북이 쌓인 토기 잔 파편도 눈에 밟혔을 겁니다. 초벌구이 1회용 토기 잔에 담긴 차이를 마신 후 깨뜨려버린 거죠. 흙으로 만든 잔이니 환경오염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빗물이 스며들어 본래 흙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고 보면 1회용이 아니라 순환재생 잔이네요. 토기 잔의 무덤을 보니 법정 스님이 인도를 여행하며 쓴 <인도기행>의 한 내용이 떠오릅니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서로 상관관계를 맺는다. 영원한 낮이 없듯이 영원한 밤도 없다. 낮이 기울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새날이 가까워진다.”

인도 차이 이야기를 하며 다소 심각해졌네요. 그래도 이렇게 듣고 나니 차이 한 잔 당기지 않나요? 인도 향신료가 없다고요? 생강, 계피도 괜찮습니다. 그럼 홍차, 우유, 생강, 계피, 물을 넣고 끓여보세요. 네, 지금 바로!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