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커피 볶는 마을
커피향미를 찾아서 8

마음을 움직이는 커피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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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담긴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시는 더 이상 시인만의 것이 아니요, 커피에 깃든 향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커피는 바리스타만의 것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커피는 우리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한다. 비록 그것이 번뇌의 세계라도 좋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무엇인지,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커피의 존재 가치이다.

아름다운 시처럼 커피가 말을 건넬 때

모든 커피가 찰나의 깨달음을 향한 길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자처하고 나서겠다면, 모름지기 깨끗해야 한다. 깨끗함(Cleanness)이란, 단지 오점이 없는 청결함을 일컫는 데 그치지 않는다. 

커피에서 깨끗함은 ‘정결함’의 다른 말이다. 많은 사람을 동원해 수십 번 결점두(defect bean)를 골라냈다고 해서 귀한 대접을 받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가 되는 게 아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시인에게서 가슴 뭉클한 시가 빚어지듯, 커피도 깊숙한 곳까지 깨끗해야 한다. 커피 생두가 겉보기에 썩은 구석 하나 없이 말끔하다 해도 날카로운 비명만큼 신맛이 자극적이어선, 진저리 칠 정도로 쓴맛이 당혹스러워선 그윽함을 피어 낼 수 없다.  

시인이 정화수를 앞에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원고지를 마주하는 것은 관능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다. 시상(詩想)이란, 100리 밖 발소리에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리는 긴 꼬리 사향고양이보다 더 예민하다. 티끌 낀 마음에서 고운 시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내부의 균형이 깨진 커피가 감미로운 향미를 뿜어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깨끗해야 속이 비친다.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의 커피농장

해발고도 2,000m에서 시퍼런 밤하늘보다 시린 땅을 딛고 자란 커피는 대관령 고랭지 배추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축복을 받는다. 병충해가 들끓지 못하는 환경이어서 생두에 흠집이 덜 나고, 낮은 기온에서 서서히 자란 덕분에 씨앗이 야물고 단맛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자란 생두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비취색 보석 같아서 ‘에메랄드’라고 불린다. 중남미 커피농장들 가운데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스페인말로서 에메랄드를 뜻한다. 

깨끗함의 진가는 커피의 향미를 섬세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섬세함(delicate)이란, 여리고 약한 면모들이 제 각각 억눌림이 없이 작은 매력들을 고르게 발산하는 상태에서 감지된다. 제왕이 없이 모든 개성이 존중 받는 평등하면서도 평화로운 향미의 세계를 비유한다. 섬세함은 향미들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비로소 발휘된다. 따라서 델리케이트(delicate)는 엘레강스(우아함; elegance)와 함께 커피 향미에 대해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다. 

우아함 역시 어느 곳 하나 모난 구석이 없어야 한다. 모든 요소들이 균형을 이룬 상태, 하모니를 이룬 상황에서만 맛볼 수 있는 관능인 것이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도 생전에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최고의 작품을 “엘레강스하고 델리케이트하다”고 묘사한 것도 이와 같은 심정에서였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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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내리고 떡잎을 틔운 커피 씨앗.
커피가 자란 땅을 헤아려 향미를 추적하는 것은 고매한 인격의 기원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사진제공.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지저분한 유리창을 통해서는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쓰고 떫고, 마르고 할퀴고, 찌르고 아린 맛은 유리에 묻는 때와 같다. 사실 이런 것들은 맛이 아니라 자극이고 통증이다. 우리의 관능이 통증을 겪는 상황에서 과일과 같은 경쾌한 산미와 꽃 같은 화사함, 꿀을 연상케 하는 단맛 등 스페셜티 커피의 덕목을 누릴 수 없다. 결점들이 이들 향미를 짓누르고 있는 탓이다. 

끊임없이 묻고, 기억하고, 간절해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깨끗한 커피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자라난 환경을 올곧게 반영하는 커피를 찾아야 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커피는 탄생의 비밀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그리스 비극보다 잔인하다. 좋은 커피를 찾는 걸음은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상대를 대접하는 것이다. 

새로운 커피를 만나 트집만을 잡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커피의 진면목을 영원히 볼 수 없다. 그것은 커피를 대하는 자신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커피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선 품종은 무엇이며, 어디의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려는 것만큼이나 간절해야 한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커피라면 스페셜티 커피가 될 수 없다. 이곳저곳에서 수확한 커피를 섞어 크기에 따라 분류해 단지 케냐AA 또는 콜롬비아 수프리모라고 불리는 커피는 이름이 없는 커피와 다름없다.

땅, 바람, 햇살, 그리고 농부의 열정

출처를 알 수 없는 커피는 기억할 수 없다. 아니, 기억할 의미가 없다. 그 커피가 발휘하는 향미의 기원을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향미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없는 커피는 성장과정을 알 길 없는 인조인간과 같다. 인성이 없다는 것은 커피에겐 향미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런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인스턴트커피보다 지루하고 따분하다.
결점두를 골라낸 에티오피아 G1 커피를 만나면 이렇게 속삭여 보라. ‘너는 네가 자란 땅을, 바람을, 햇살을, 너를 키운 농부의 열정을 기억하니?’ 

스페셜티 커피 운동의 기원은 2018년 7월, 96세를 일기로 별세한 에르나 크누첸(Erna Knutsen) 여사가 1974년 <티 앤 커피 트레이드 저널(Tea & Coffee Trade Journal)>에 게재한 글에서 유래되었다. 고인은 기고문에서 “가장 좋은 향미를 지닌 커피 생두는 특별한 미세기후를 갖춘 곳에서 나온다”면서 커피에 와인의 테루아(Terroir) 개념을 접목시켰다. 그는 “커피는 농작물이므로 나무가 자란 환경에 따라 향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러한 개성을 존중하며 음미해야 한다”는 가치를 일깨워줬다.

“한 잔에 담긴 커피의 향미를 올바르게 구별해 마시자”는 소중한 가치가 커피애호가들의 실천운동으로 번지면서 산지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0포대 남짓 커피를 생산하는 자그마한 농장들도 속속 조합에 콩을 넘기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을 찾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맛을 추구하는 커피애호가들이 바다 건너 형편이 어려운 커피농부들의 삶을 보다 여유로운 쪽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 커피가 지닌 향미를 추구하고, 자라난 땅과 개성을 존중하는 애호가들의 노력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다. 

커피 한 잔을 가려 마시며 커피를 키워낸 농부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거친 마음을 보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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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한 커피농장에서 핸드피킹을 하는 농부들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박영순 님은 21년간 신문기자로서 와인,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 등 식음료를 취재하면서 향미에 몰입했습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향미 관련한 자격증 30여종을 비롯해 미국요리대학(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플레이버 마스터를 취득한 뒤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과 경민대 호텔외식조리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년 <커피인문학>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