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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향미를 찾아서 12

113년 전통, 콜롬비아 라 루이사 농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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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후르츠처럼 강렬하고 화려한 향을 내뿜고 있는 카투라 품종의 커피꽃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주. 동트기 전 새벽 공기를 가르는 닭의 울음소리가 이곳 라 루이사(La Luisa) 농장에서는 산새의 지저귐처럼 아름답게 계곡을 울린다. 그러나 커피농장 순례로 골아 떨어진 나그네를 침대에서 커피 밭 사잇길로 이끌어낸 것은 잠결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진 커피 꽃 향이었다. 흔히 재스민처럼 은은하다고 하지만 커피 밭에서 발산되는 꽃향은 패션프루츠처럼 화려하고 강렬했다.

커피 꽃 향에 잠을 깨다니…

인천공항을 출발해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ivar) 에 오기까지 36시간이 넘게 걸렸다. 전날 저녁 성당 앞에서 땅거미가 지도록 필자를 기다리던 후안 파블로 베레즈(Juan Pablo Velez)가 “무산소 발효커피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100여 년간 4대째 이어지고 있는 가업으로 라 루이사 커피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에 있는 작은 창고 겸 사무실에는 건조를 갓 끝낸 무산소 발효커피(Anaerobic fermentation coffee, 이하 애너로빅 커피)가 50여 포대 쌓여 있다. 마른 지푸라기와 오크통의 바닐라, 꾸덕꾸덕한 건포도에서 감지되는 단향이 어우러져 지그시 눈을 감게 만든다. 이 멋진 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지프에 몸을 싣고 꼬리에 꼬리는 무는 생각에 취하다 보니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있는 숙소까지 비포장 거친 비탈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 밤이 어제 밤 필자의 마음과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더욱이 커피 꽃 향에 잠을 깼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축복이리라.

“오늘 많이 힘들 테니, 든든히 먹어 두세요!” 후안파(그는 이렇게 부르기를 허락했다. 우리는 밤사이 럼주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됐다)가 오전 6시에 아침 식탁으로 초대하고는 돼지고기를 껍질째 짭짤하게 튀겨낸 음식을 건네주었다. 삼겹살을 기름이 쭉 빠지도록 구웠을 때와 비슷한 맛이 났다. 짠맛이 강한 것은 탈수를 막기 위한 지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겨울이지만 적도에 가까운 이곳은 계절이 없다. 절기를 비가 오는 시기와 건조한 시기로 나눌 뿐이다. 2월에도 낮에는 햇볕이 따갑고 체리피커(cherry picker)들이 체감하는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돈다.

260ha에 달하는 그의 커피농장에는 봉우리가 4~5개 있다. 좋은 품질의 커피들은 고산지대에서 나오기 때문에 스페셜티 커피나무들이 자라는 밭은 산 정상을 타고 펼쳐져 있다. 따라서 길이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안데스산맥의 거친 기운 탓에 잠시라도 궁둥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도록 지프가 요란하게 덜컹거린다. 타이어가 펑크 나지 않는 게 희한할 지경이다. 

맛을 향한 욕망이 빚어낸 무산소 발효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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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침용 방식으로 무산소 발효커피를 만드는 3000리터 용량의 스테인리스 발효통

봉우리 2개를 넘었을까, 라틴음악이 경쾌하게 들려 나오는 애너로빅 가공 창고 앞을 송아지만큼 큰 누렁이가 떡 지키고 있다. 높이 4m에 달하는 스테인리스 발효통이 네 다리를 쭉 펴고 거인처럼 서 있다. 한 번에 맥주 3000리터를 만들던 발효통을 후안파가 애너로빅 커피를 만들기 위해 사들였다.

“스테인리스 발효통은 온도와 pH 농도를 측정하며 조절할 수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좋고, 탄소를 인위적으로 넣어 무산소 환경을 빨리 만들어 줌으로써 원하는 맛을 내는데 유리하지요.”

후안파는 스테인리스 발효통으로 ‘탄산침용 내추럴(carbonic maceration natural)’과 ‘더블퍼멘테이션 워시드(double fermentation washed)’를 가공한다고 설명했다.

탄산침용은 2015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사사 세스틱(Sasa Sestic)이 선보이며 주목을 끌었다. 탄소 주입을 통해 무산소 발효 환경을 빨리 만들어 주면 맛이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부드러워진다. 무산소 상태에서 커피체리의 과육 또는 점액질은 이산화탄소나 물로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유기산과 알코올 등 중간물질이 쌓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커피 씨앗에 들어 있는 다양한 향미 전구체에 화학적 변화가 생기고, 이런 변화는 로스팅을 거치면서 기존 가공법과는 다른 맛을 연출하게 된다. 후안파는 스테인리스 발효통 내부의 온도와 산도 조절을 통해 커피체리가 120시간 동안 서서히 무산소발효가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어 체리째 햇볕건조를 하기 때문에 ‘내추럴’이란 용어를 붙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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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년 가업을 잇고 있는 후안 파블로 베레즈(Juan Pablo Velez)와 필자(오른쪽)가 무산소 발효과정을 거쳐 가공하고 건조를 마친 커피체리를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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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소발효를 마치고 건조 중인 커피체리(라 루이사 농장 제공).

“더블퍼멘테이션 워시드는 스테인리스통에서 체리 상태로 96시간 발효하고 꺼내 펄핑(체리의 껍질을 제거)을 한 뒤 다시 통에 넣어 72시간을 더 발효합니다. 파치먼트 상태에서도 발효를 진행해서 ‘더블’이고요, 파치먼트 겉면의 점액질이 상당부분 씻긴 상태로 건조장으로 가기 때문에 ‘워시드’라는 용어를 붙였습니다.”

같은 밭에서 재배한 카투라(Caturra) 품종을 가지고 각각 탄산침용과 더블발효를 거친 커피의 맛은 분명하게 달랐다. 과일의 산미와 단맛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면서 질감이 실크가 혀에 스치는 듯한 점은 비슷하지만, 탄산침용 커피는 체리와 블루베리의 면모가 우세하며 럼과 다크초콜릿을 동시에 머금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더블발효커피는 흔히 워시드 커피가 주는 생동감이 보이고 시트러스(citrus)의 산미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면서도 딸기사탕처럼 화사했고, 후미에서는 견과류의 향미가 비쳐졌다.

후안파는 효모를 접종해 예측 가능한 맛을 내게 하는 ‘애너로빅 효모발효 커피(Anaerobic yeast fermentation)’와 스테인리스통-오크통을 연계한 ‘무산소 이종 더블퍼멘테이션 커피’ 생산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2017년 한국을 찾아 서울카페쇼에서 애너로빅 커피에 대한 소비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목격했다.

“좋은 커피(good coffee)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지식과 열정, 좌절을 이겨내는 수많은 시도가 필요합니다. 카페쇼에서 애너로빅 커피가 세계적인 문화로 퍼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커피의 맛이란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품종과 재배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공과정을 통해 품종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맛을 표현합니다. 애너로빅 커피는 인간이 커피의 맛을 발현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창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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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800m에서 수확한 스페셜티 커피체리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커피농부.

향미의 지평을 새롭게 열다

후안파에게 에너로빅 커피는 예술과 같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의 감동이 남다르듯, 똑같은 물감이라도 고흐의 붓끝에서는 강렬한 인상이 표출되듯 그는 같은 품종이라도 향미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1907년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티피카 커피나무를 심었을 때의 굳은 결기가 후안파의 핏줄을 흐르고 있다. 루이사는 고조 할머니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철수나 영희처럼 흔한 이름으로 국민을 상징한다. 따라서 루이사 농장은 그 이름 자체가 곧 콜롬비아인 셈이다.

라 루이사 농장에는 80만 그루의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70%가 카투라, 20%가 콜롬비아와 카스티조(Castillo) 품종이다. 나머지가 스페셜티 커피로서 게이샤(Gesha), 우시우시(Wush-wush), 파카마라(Pacamara), 마라고지페(Maragogype), 카투로 키로조(Caturro Chirozo), SL-28, 타비(Tabi) 등이다. 최근 시즌에는 애너로빅 커피를 3톤 가량 만들었다. 한 시즌 생산량이 500톤 정도이니 비율로만 치면, 0.6%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너로빅 커피의 맛이 잡히면 양을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온난화와 병충해 발생으로 재배 단계에서 질 좋은 커피를 만들거나 유기농 커피를 생산하는 게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너로빅 커피는 향미의 품질을 높여 커피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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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을 이용해서 무산소 발효커피를 만들기도 한다.

재배자들에게 애너로빅 커피는 결코 낭만이 아니다. 한두 번 해봐서 아니면 그만두는 소일거리는 더더욱 아니다. 커피 밭에서는 한 줄기 바람이라도 나무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수많은 일꾼과 가족들이 커피 하나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애너로빅 커피가 한 때 유행으로 그친다면 적지 않은 재배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애너로빅 커피의 물결을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는 사이, 후안파는 노를 잡고 바다로 나섰다. 그의 애너로빅 커피가 고조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볼리바르 사람들의 생계를 해결해주는 축복이 되기를 기원한다.

글 | 박영순
사진 | Jenny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