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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향미를 찾아서 4

이름을 불러줄 때 ‘관능’이 된다

커피의 향미를 올바로 즐기는 데 필요한 정보들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 시작은 분명 품종(Variety)이다.
재배 환경에 맞는 우량한 씨앗을 확보하는 것은, 등산에 비유하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어느 지점에서부터 걷기 시작하느냐에 비유할 수 있겠다. 한 잔의 완벽한 커피를 만들고자 할 때 일단 좋은 품종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유익하다. 로스터와 바리스타의 열정과 기술이 커피의 맛을 더욱 빛내주기는 하지만 생두 자체의 품질이 좋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 해발 1800m에서 결실을 맺은 엘로우 버번 품종.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하며 자란 커피가 장차 멋진 향미를 내뿜게 된다.

“어떤 커피라도 내게 가져오시오. 멋진 맛을 이끌어내 드리리다”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은 허영(虛榮)이다. 혹시라도 “커피는 영혼으로 내리는 것이야”라며 커피의 향미가 자신의 손기술에 좌우하는 것처럼 떠든다면, 그것은 심지어 기만(欺瞞)이다.

한 잔에 담긴 채 내 앞에 놓인 커피의 품질을 올바로 알고 싶다면, 먼저 무슨 품종인지 질문하라. 그것은 한 인격체를 만나 이름을 묻는 것과 같다. 커피의 이름을 불러 줄 때, 그 커피는 비로소 나에게로 와 잊히지 않을 구체적인 관능이 된다.

커피 품종에 담긴 스토리…원종 티피카(Typica)

커피의 품종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재배지와 자라난 환경에 관한 정보도 알게 된다. 티피카(Typica) 품종이라고 하면 하와이 코나와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을 떠올리는 동시에 연약한 나무를 키워내기 위해 온도와 물, 일조량, 미네랄을 적절하게 맞추려 애쓰는 재배자의 모습이 스쳐간다.

티피카는 개량되지 않은 원종(Origin)으로 17세기경 네덜란드에 의해 예멘에서 인도네시아로 전해지고, 이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퍼졌다. 많은 원종들이 그러하듯이 티피카는 병에 약하지만 수확에 성공하기만 하면 밝은 산미와 꿀 같은 단맛, 은은한 꽃향기 등 기분을 좋게 하는 풍성한 향미로 보답한다. 파푸아뉴기니 커피는 대체로 자메이카에서 선교사에 의해 전해진 티피카 품종이다.

티피카는 에티오피아에서 예멘, 네덜란드, 프랑스를 거쳐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에 전해졌다. 이때가 1723년쯤이다. 마르티니크 섬을 거친 커피는 브라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등 중남미에 퍼졌다. 나중에 이 품종의 DNA를 분석해보니 에티오피아 원종들과 유전자배열이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스페인어로 ‘대표적인’을 뜻하는 ‘티피코(Typico)’란 명칭이 붙었다.

커피 품종이 6500종에 달한다고 하니 품종을 모두 기억할 순 없다. 그러나 십 수 가지의 원종과 재배종(Cultivar)이 교배하거나 돌연변이를 일으켜 다양성이 증폭되는 것이니만큼 몇 가지 주요 품종을 알아두면 많은 품종들의 향미적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다. 재배종은 농업기술에 의해 생산돼 자연에서는 잘 관찰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원종과 구분된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버번’과 예멘, 에티오피아 원종

티피카처럼 원종에 가까운 재배종으로 버번(Bourbon)이 있다. 처음엔 티피카의 돌연변이 종으로 분류했지만, 유전자 분석에서 티피카와는 독립적인 원종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18세기 초 프랑스가 예멘에서 빼내 마다가스카르 섬 동쪽에 있는 부르봉(현 레위니옹)섬에 옮겨 심은 것으로, 훗날 브라질로 전해져 전성기를 맞는다. 마치 토착품종인양 브라질을 대표하는 커피가 됐다.

티피카에 비해 수확률은 좋지만 향미에서 산미의 옥타브와 단맛의 강도가 약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특유의 부드러움과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향 덕분에, 와인으로 치면 강건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보다 격조가 있다는 칭찬을 받는 피노 누아(Pinot Noir)에 비유된다. 브라질, 탄자니아, 르완다, 과테말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품종이다.

이와 함께 소문난 원종으로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먼 옛날부터 예멘에서 자라 토착종이 된 예멘 모카 마타리(Yemen Mocha Mattari)와 같은 예멘 고유 품종과 게샤(Gesha)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의 한 숲에서 발견돼 코스타리카, 콜롬비아를 거쳐 파나마에 전해져 세계적인 커피로 꽃을 피운 게이샤(Geisha) 종이 있다.

게이샤 품종은 콩의 모양이 길쭉하고 날씬하다.

커피애호가라면 대체로 에티오피아 커피에 매료되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시원지로서, 자연에서 자라는 모든 커피의 고향인 셈이다. 따라서 ‘소중한 전통을 지닌 커피’라는 의미가 담긴 ‘에어룸(Heirloom)’이라는 명칭이 품종을 통칭하고 있다. 생김새가 티피카와 버번에 비해 작으면서 길쭉하다. 향미가 강한 특징이 있는데, 사실 에티오피아 커피의 향미는 품종보다 가공법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지역명인 예가체프(Yirgacheffe)는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커피를 지칭하는 품종명이기도 하다. 스파이시하고 향기로우면서 단맛이 좋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위적인 품종 개량으로 탄생된 커피들

원종들은 인간의 눈에 띄기 오랜 전부터 유구한 세월을 서식지에 적응해왔다. 커피가 가장 멋진 향미를 낼 수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의 고향 땅이다. 그러나 원종들은 익숙하지 않은 재배지로 옮겨지면서 병충해에 약하거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문제점을 드러냈다. 재배자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 돌연변이 유발, 접붙이기, 유전자 조작 등 품종 개량으로 원종들을 못살게 굴었다.

자연적인 돌연변이를 통해 버번, 마라고지페(Maragogipe), 켄트(Kent), 카투라(Caturra), 파카스(Pacas), 오렌지 버번(Orange Bourbon) 등과 같은 요긴한 품종들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들 커피만으로는 보다 수익성을 높이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지 못했다.

케냐 커피가 와인과 같은 자극적인 산미를 발휘하는 것은 독특한 수세가공과 실험실에서 탄생한 SL28, SL34 품종의 합작품이다. SL은 나이로비에 있는 스콧 실험실(Scott Laboratory)에서 따왔다. 두 품종을 밭에 함께 심는데, SL28은 가뭄에 강하고 단맛이 농후하고 바디가 좋다. SL34은 고지대에서 잘 자라는 특성 덕분에 와인을 연상시키는 강인하면서도 풍성한 산미와 활달함이 매력적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콜롬비아 킨디오주의 커피농장에서 카투라 품종의 가지치기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필자.

마일드한 커피의 대명사인 콜롬비아는 카투라, 카스티조(Castillo), 콜롬비아 품종 등이 대세다. 버번종이 돌연변이를 일으킨 카투라는 1937년 브라질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1952년 콜롬비아에 전해져 전체 커피의 45%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버번 품종보다 작아 ‘난쟁이 버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지에 열매가 밀도 높게 달리고 나무 사이의 간격이 가까워도 잘 자라기 때문에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다.

카스티조는 카투라와 티모르(아라비카와 로부스타를 교배한 하이브리드 품종)의 교배종으로 녹병(Coffee rust)에 강한 특성 때문에 지구온난화 현상 속에서 환영받는 품종이다. 콜롬비아 품종 역시 카투라와 티모르 교배종으로 생산성이 좋다. 두 품종은 로부스타의 성격이 가미돼 카투라보다는 산미와 단맛, 바디 등 맛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카스티조의 경우, 킨디오주의 에스메랄다 농장(La Esmeralda)처럼 2016~2017년 세계커피품평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재배자에 따라 명품 커피가 되기도 한다.

커피를 안다는 건, 곧 생두를 안다는 것

이처럼 산지에 따라 적응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커피들이 적지 않다. 일부 국가들이 대량 생산으로 커피의 맛을 획일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잖게 나오는 상황에서 이들 커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선함을 주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엘 살바도르의 파카마라(Pacamara)는 마라고지페와 카투라의 교배종인데 밝고 가벼운 너티의 향미가 인상적이다. 인도네시아에 토착화한 수마트라 티피카(Sumatra Typica)는 버섯류의 느낌이 나고 스파이시하면서 산미가 낮아 묵직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빌라 사르치(Villa Sarchi)는 코스타리카의 사르치 지역에서 발견된 버번의 변종으로, 우아한 산미와 농축된 과일의 단맛이 일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게다가 나무의 크기가 작으면서도 버번종보다 생산성이 높아 재배자들의 손을 자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커피 생두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떻게 재배된 것인지를 아는 것은 그 커피의 향미가 어떨지를 예측하는 유익한 정보가 된다. 커피를 안다는 것은, 곧 생두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품종을 알고 마시면 한 잔에 담기는 커피의 향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박영순 님은 21년간 신문기자로서 와인,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 등 식음료를 취재하면서 향미에 몰입했습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향미 관련한 자격증 30여종을 비롯해 미국요리대학(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플레이버 마스터를 취득한 뒤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과 경민대 호텔외식조리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년 <커피인문학>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