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커피 볶는 마을
커피향미를 찾아서 2

낙엽을 태우면 커피가 떠오르네

잘 익은 커피 열매

깊어가는 가을, 당신이 진정 커피애호가라면 어떤 커피를 음미하겠는가?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의 수필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히 향미를 평가하고 묘사하는 ‘커피테이스터(Coffee Taster)’로서도 손색이 없다. 표현력이야, 감히 누가 가산을 평하랴! 커피 향을 묘사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일본 ‘사무라이 커피’의 기원

개암은 고소함과 함께 버터처럼 감미로운 여운을 선사하는 헤이즐넛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요즘 들어 인공 헤이즐넛 향을 첨가한 커피가 시중에 돌며 소비자의 관능을 농락하지만, 가산이 글을 쓸 당시엔 커피라고 하면 일본식 원두커피였다. 그때는 가향커피(Flavored coffee)가 아예 없었고, 1938년 네슬레가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인스턴트커피도 국내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일본에서 커피는 우리보다 30년 정도 빠른 1860년대 중반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북해도 변방을 지키던 사무라이들이 손발이 붓는 풍토병을 앓자, 러시아에서 민간치료요법의 하나로 커피를 들여와 마신 것이 효시가 됐다. ‘사무라이 커피’는 커피원두를 손절구에 거칠게 빻아 헝겊 주머니에 넣고 뜨거운 물에 우려내 먹는 방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커피가 퍼졌는데, 추출법이 바로 사무라이 식이었다. 우려내기용으로 쓰는 커피는 로스팅을 강하게 하지 않고 1차 크랙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무리하는데, 이 정도로 볶인 커피에서는 고소한 너트 향과 단맛이 강하다. 따라서 가산은 커피에서 헤이즐넛이나 아몬드, 땅콩의 고소함을 느끼는 재미에 푹 빠졌을 것이다. 커피의 향미가 낙엽을 태우는 데에서도 피어났으니, 연기가 몸에 밸 때까지 서 있으며 지그시 눈을 감을 수밖에….

나무에 있으면 단풍이요, 떨어지면 낙엽이다. 낙엽을 태우면 커피의 향이 느껴지는 것은 낙엽이나 커피나 자연 그대로의 것에 불을 가함에 따라 빚어지는 향미의 향연인 것이다. 낙엽이 실제 커피 향을 피워낼 수 있을까, 아니면 문학적 상상력일까?

아라비카 커피 꽃과 열매
나무에 있으면 단풍이요, 떨어지면 낙엽이다. 낙엽을 태우면 커피의 향이 느껴지는 것은 낙엽이나 커피나 자연 그대로의 것에 불을 가함에 따라 빚어지는 향미의 향연인 것이다.

낙엽과 커피의 상관관계

나무는 주변에서 흡수할 수 있는 물기가 마르면 생존을 위해 잎사귀로 가는 수분을 막으며, 하나 둘 낙엽을 지게 만든다. 이즈음 낙엽의 주성분은 셀룰로오스(cellulose), 헤미셀룰로오스(hemicellulose), 리그닌(lignin) 등으로 이루어진 목재와 비슷하게 된다. 그렇지만 낙엽 타는 냄새가 장작 타는 냄새와 같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잔존한 수분기와 엽록소, 낙엽에 붙어사는 애벌레, 박테리아, 곰팡이 등 유기체들 때문이다.

커피가 좋은 향을 뿜어내는 것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질로 이루어진 생두가 불에 의해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 캐러멀화 반응 등을 일으킨 덕분이다. 낙엽에 남아있는 다양한 영양성분과 구조를 이루는 탄수화물이 불기운을 받아 단백질 덩어리인 미생물과 ‘아미노 카보닐 반응(Amino-carbonyl reaction)’을 일으키면서 커피와 유사한 향기를 발산한다. 특히 카보니(Carbony), 스모키(Smoky)라고 표현하는 연기냄새는 커피를 볶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향과 비슷한 면이 있다.

1938년 이효석의 커피 예찬

그러나 ‘낙엽을 통한 커피예찬’이 커피애호가들의 공감을 특히 불러일으키는 바는 따로 있다. 가산에게 낙엽은 이브 몽땅이 노래한 ‘고엽(Autumn leaves)’처럼 덧없는 인생에 대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다. 의기소침과 우울증을 부르는 노스탤지어(Nostalgia)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암울한 시절에 황량한 나무 아래 나뒹구는 낙엽은 설움을 북받치게 했을 텐데, 가산은 이를 극복하고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고 역설했다. 일각에서는 작가에게 치열한 의식을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한가롭게 커피 타령을 한다고 힐난하지만, 커피가 지닌 각성효과에 주목한다면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각성(覺醒)이 무엇인가.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서슬 퍼랬던 시절, 가산은 수필을 통해 낙엽-연기-커피향-각성-깨어남-맹렬함-의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메시지를 겨레에게 전달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커피를 구실로 우리 겨레가 ‘깨어나야 함’을 웅변하려던 것은 아닐까? 커피애호가라면, 겨울이 오기 전에 낙엽을 태우며 연기에 깃든 커피의 ‘숨겨진 뉘앙스’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필자는 한 잔의 커피를 들고 뜰로 나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낙엽더미를 사이에 두고 1938년 이효석과 마주한다. 선생이 낙엽에 불을 지핀 지 77년. 어쩌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을이면 한반도 곳곳에서 낙엽이 횃불처럼 타올랐을 지 그 누가 알겠는가.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박영순 님은 21년간 신문기자로서 와인,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 등 식음료를 취재하면서 향미에 몰입했습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향미 관련한 자격증 30여종을 비롯해 미국요리대학(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플레이버 마스터를 취득한 뒤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과 경민대 호텔외식조리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년 <커피인문학>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