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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향미를 찾아서 11

제4의 물결로 주목받는 무산소 발효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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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킨디오 라 모렐리아 농장에서 커피비평가협회 박영순 회장이 무산소발효 커피의 건조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커피에 관한 이야깃거리들이 ‘무산소 발효(Anaerobic Fermentation)’의 확산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요즘 커피 테이스팅 자리에 가면 꼭 한두 종씩은 무산소 발효커피가 등장할 정도가 화제가 된다. 물량이 많지 않고 가격이 비싼 탓에 쉽게 손이 가지 않지만, 커피애호가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면서 커피 모임에 회자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무산소 발효는 커피가 씨앗에서 컵에 담기기까지(from seed to cup)의 긴 여정에서 ‘가공(processing) 단계’에 해당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씨앗을 건조하기 직전에 커피열매나 점액질이 묻은 파치먼트 상태에서 수행하는 작업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무산소 발효의 원리와 방식에 관한 개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발효’이다. 발효는 미생물에 의해 유용한 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인데, 좁게는 당질이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것을 일컫는다. 

굳이 ‘무산소’라는 용어를 붙인 이유는 산소발효(Aerobic fermentation)라는 용어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산소발효는 유기발효 또는 호기성 발효라고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산소가 존재하는 환경에서 잘 번식하는 초산균(Acetic acid bacteria)에 의해 다양한 식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 수 있다. 커피체리나 점액질을 산소가 있는 상태에서 발효하면 자극적인 산이 되기 때문에 커피 가공에서는 무산소 발효나 산소가 매우 희박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발효에만 집중해도 좋다. 

2015년 ‘시애틀 WBC’에서 첫 선

미생물이 당질을 분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음식물을 먹는 것과 같다. 산소가 있는 상태에서는 미생물이 당질을 완전히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한다. 에너지 생성 효율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는 당질을 완전히 분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물질이 쌓인다. 이들 물질은 자연 상태에서는 온도와 산소 유무에 따라 다른 미생물들이 생겨나면서 분해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사람에게 유용하면 ‘발효’, 먹을 수 없는 고약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가 되는 것이다.

무산소 발효 커피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5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이 계기가 되었다. 호주의 사사 세스틱(Sasa Sestic)은 이 대회에서 ‘탄산침용(Carbonic Maceration)’ 커피를 선보이며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는 깔끔한(Clarity) 맛을 내기 위해 잘 익은 커피 체리를 딴 후 파치먼트 상태로 스테인리스 통에 담았으며, 이산화탄소를 주입해 산소가 없는 상태를 한동안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스테인리스 통 속은 무산소 발효가 진행되는 환경이 조성된다.

무산소 발효는 중남미 커피산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전 세계 산지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무산소 발효 커피가 커피 문화에서 갖는 가치는 우선 색다른 맛이다. 맛의 추구는 여전히 커피문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커피의 역사는 맛을 높이는 쪽으로 흘러왔고, 지금도 그 쪽을 향해 담대하게 흐르고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오랜 기간 커피 재배 환경(테루아)의 개선과 품종 개량에 노력이 기울어져 왔는데, 1980년대 브라질에서 펄프드(pulped) 내추럴 가공의 보급을 시작으로 다른 차원의 시각을 갖게 됐다. 건조기간을 되도록 짧게 줄임으로써 비로 인한 품질 저하를 막으려던 노력이 커피 맛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펄퍼(Pulper)로 과육을 벗겨낸 뒤 건조함으로써 맛의 일관성을 지켜내려 한 펄프드 내추럴 기법은 2008년 코스타리카에서 단맛을 부각시킨 ‘허니 프로세싱(Honey Processing)’으로 진화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무산소 발효 커피의 가치는 우선 산지에서 생산하는 커피 품질의 일관성을 위한 노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세스틱도 결승전 시연에서 “커피 가공방식들의 불균일성과 이로 인해 맛과 품질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테인리스 통 속의 탄산침용을 도입했다”고 털어놓았다. 커피보다 품질을 한층 더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와인제조 공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의 응용력은 마침내 획기적인 변화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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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열매에 들어 있는 씨앗. 파치먼트 겉면을 당질과 팩틴 등으로 구성된 끈적한 점액질이 감싸고 있다.

발효과학을 응용한 커피 맛의 색다른 진화 

탄산침용으로 인해 달라진 맛은 어찌 보면 ‘뜻밖의 부산물(By-product)’이었다. 세스틱은 이것을 커피 향미의 새로운 장르로 끌어올렸다. 그가 내추럴 가공한 수단 ‘루메’ 원두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뒤 카푸치노를 만들었더니 깔끔한 맛과 발랄함이 아쉬웠다. 고민 끝에 그가 택한 방법은 워시드 탄산침용을 거친 수단 루메를 절반 섞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빚어진 발랄함과 시트릭(Citric)한 산미, 자두와 복숭아의 뉘앙스, 그리고 크리미한 촉감과 건살구의 여운이 그에게 챔피언 트로피를 안겨줬다.

이후 세계 각종 대회에서 무산소 발효 커피를 사용한 바리스타들이 잇따라 정상을 밟으면서 “우승하려면 무산소 발효 커피를 써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2019년 세계바리스타챔피언인 전주연 씨가 사용한 커피도 ‘젖산발효(Lactic Acid Fermentation)’를 거친 무산소 발효 커피였다. 
2018년과 2019년 미국바리스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한 선수들도 전 씨와 같은 콜롬비아 라팔마(La Palma)의 엘투칸(El Tucan) 농장에서 생산된 젖산발효 커피로, 품종은 티피카와 레드버번을 교배한 시드라(Sidra)였다. 48시간 젖산발효를 거친 커피들은 한 잔의 에스프레소로 담길 때 단맛과 건과일류의 향미가 풍성해지고 질감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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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열매의 당도를 측정하는 모습. 과육은 거의 없지만 점액질이 미생물로 하여금 발효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세스틱의 탄산침용과 전 씨의 젖산발효는 무산소 발효 환경을 조성하고 맛이 부드럽고 과일 맛이 풍성해진다는 점에서, 또 와인에서 사용되는 기법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와인제조에서 두 가지 방법이 목표하는 바와 진행되는 단계가 다르다. 탄산침용은 적포도를 송이째 그대로 스테인리스 통에 담고 밀봉(Whole Bunch Fermentation)한 뒤 이산화탄소를 주입해 산소를 제거한 무산소 상태에서 진행된다. 포도 알갱이가 으깨지지 않아 효모나 다른 미생물의 개입 없이 효소들의 한 세포 내 발효만 진행된다. 이 덕분에 껍질에 있는 탄닌은 거의 나오지 않아 색상이 은은하고 부드럽고 과일 향미가 좋은 면모를 지니게 된다. 

이에 비해 젖산발효는 와인제조 공정에서는 말로락틱 발효(Malo-lactic fermentation)로 부르는데, 유산균이 번식하는 환경을 만들어 말산(Malic Acid, 사과산)을 젖산(Lactic Acid)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산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날카로움을 주는 말산이 요구르트 같은 부드러운 젖산으로 바뀌면서 버터와 같은 부드러움과 꽃과 과실 향이 도드라진다. 

물량 부족과 비싼 가격, 대중화로 해결 기대

무산소 발효를 통해 기존에는 경험하지 못한 향미를 커피에서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와인과 똑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순 없다. 예를 들어 젖산 발효를 통해 만들어진 향미물질을 와인에서는 직접 마시는 것이지만, 커피는 이 과정을 통해 향미 물질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로스팅을 거쳐야 하고, 사실 섭씨 200도를 넘나드는 온도에서 이들 물질들은 대부분 소실되기 때문이다. 젖산이 사과산보다 부드럽지만, 커피의 경우에는 로스팅을 통해 젖산이나 사과산이나 모두 거의 사라진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무산소 발효를 통해 만들어진 커피가 부드럽거나 풍성한 또는 적어도 기존과 다른 향미를 발휘하는 것은 와인보다 더 깊숙한 이화학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현재로선, 젖산 발효 커피에서 공통적으로 시나몬과 견과류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젖산 때문에 시나몬과 견과류의 향미가 나타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탄소의 압력 때문에 젖산 등 발효 생성물들이 생두 속으로 들어가 향미가 독특해졌다는 주장도 과학적이지 못하다. 생두에 침투된 젖산의 향미를 한 잔의 커피에서는 감지하기 어렵다. 커피의 향미를 좌우하는 것은 생두에 들어 있는 다양한 향미의 전구체(Precursor)이다. 전구체들이 로스팅을 거쳐 다양한 향미 성분들로 분해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아라비카 커피로 추출한 커피에서 견과류나 초콜릿의 느낌을 자아내는 여러 물질 가운데 2-메틸 퓨란(2-Methyl furan)을 예로 들면, 이 물질은 커피 생두에 들어 있는 폴리페놀 물질로부터 만들어진다. 시나몬 향미를 불러일으키는 유게놀(Eugenol)과 3-페닐-2-프로페놀(3-phenyl-2-propenal)도 거대한 폴리페놀 화합물을 전구체로 삼아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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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액질로 둘러 쌓인 파치먼트. 이것을 무산소 상태에 두고 온도를 적절하게 맞추면 젖산발효가 일어난다.

무산소 발효 커피가 색다른 맛을 내는 이유를 단순히 발효의 산물로 보기보다는 발효 과정을 통해 생두에 형성되는 전구체에서 원인 찾는 노력이 주효했다. 일관된 맛으로 생산자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한편 색다른 맛, 더욱이 고급스런 맛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잡는 무산소 발효 커피는 커피 문화에 새로운 물결, 바로 제4의 물결을 불러일으킬 강력한 후보가 될 만하다. 

현재로선 높은 가격이 문제인데, 대중화의 길을 거쳐 자연스레 해소될 문제로 보인다. 맛을 추구하는 욕구가 불러일으킨 ‘제3의 물결’ 속에서 무산소 발효 커피라는 제4의 물결이 거대한 기운을 키워나가고 있다.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