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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칸타타] 커피, 유럽에 상륙하다

‘악마의 음료’에서 바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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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까지 커피는 음료라기보다는 약이었고, 종교적인 신념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 커피의 효용성이 달라집니다. 유럽인들이 중동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랍인들이 즐기는 커피를 목격하게 되고, 자신들도 맛을 보면서 커피의 효능에 빠져들게 되지요. 

그리스도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여행가와 학자들이 지중해 연안의 레반트(Levant)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슬림들이 새까만 음료를 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술은 금기시하면서 진한 음료를 마신다’면서 커피를 '아라비안 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럽인 중 일부는 이교도인 무슬림들이 마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고 하면서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점차 유럽인들도 커피에 빠져듭니다. 

‘커피 메신저’ 베니스 상인

그러다가 1615년 베니스의 상인들에 의해 커피가 처음으로 유럽에 상륙합니다. 이제 커피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유럽인들에게 커피는 더 이상 ‘알라의 음료’가 아니었고 약도 아니었습니다. 향기가 좋은 음료였으며, 약은 아니더라도 몸에 활력을 주는 반가운 음료였던 것이지요.

카페人아랍에서 벗어나 커피가 유럽에 상륙한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길게 봐선 거의 1천 년간 갇혀 있던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탈출을 의미하고, 동시에 이슬람권을 벗어나 그리스도교를 믿는 국가들로 커피가 퍼지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커피는 유럽으로 전해져 서구 열강의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루트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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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커피가 처음 들어온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 1720년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 by wikimedia

카페人커피가 아라비아 반도에 갇혀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무슬림들 사이에서 커피는 마호메트의 목숨을 구한 ‘신의 음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마호메트는 610년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요, 동굴에서 수행을 할 때 거의 죽어가던 것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커피 음료를 주어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점차 커피를 몸에 담은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믿음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실제 커피를 마시면 졸지 않고 밤새 기도할 수 있었으며, 힘이 솟아나는 기분도 들자, 신앙인들에게는 요긴한 음료가 됐던 것이지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급증해 커피가 부족하다보니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카페人사람들이 원하는데, 그것을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커피의 효용성이 차차 알려지면서 커피의 매력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퍼지게 됩니다. 커피의 역사에도 문익점 선생님처럼 값진 물건을 숨겨간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인도에 살던 이슬람 수도승 ‘바바부단’이 1,600년대 메카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커피를 경험하고는 몰래 가져갈 궁리를 합니다. 당시 커피 씨앗을 유출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지는 위험한 일이었지요. 바바부단은 목숨을 걸고 커피 씨앗 일곱 알을 몸에 숨기고 인도로 가져가 성공적으로 키워냅니다. 이것이 인도 커피의 원조가 됐고요.

카페人그땐 커피가 귀했던 모양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것을 보면요.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급증하다보니 물량이 부족했고, 값이 뛰었습니다. 커피로 큰돈을 벌 수 있게 되니까 독점하려 애를 쓴 것이지요. 그렇다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커피가 항상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커피 박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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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커피하우스. 16세기 중반 무렵, 시리아인으로 알려진 하쿰과 샴스(Hakum and Shams)가 터키 이스탄불에 처음으로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by LucaP, flicker(CC BY-NC)

‘커피 박해’의 종말

카페人커피를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있었던 건가요?

커피 순교자 명단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요. 커피 박해는 1500년대 초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이집트 카이로 등에서 발생했습니다. 17세기 초 터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기도는 하지 않고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아 수다를 떤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런저런 불만이 나오게 되고, 위정자들로서는 불편했겠지요. 커피는 사람들간 활발한 소통을 불러오면서 사회적인 각성, 그러니까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만듭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카페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카페人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면 저항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결국, 커피 박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논란 끝에 커피를 탄압한 지도자가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지요. 커피를 탄압한 측도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었습니다. 마호메트의 언행을 모은 《하디스(Hadith》에는 석탄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는데, 볶은 커피는 석탄과 같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면서 마시는 것도 이슬람의 식습관에서 보면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입김으로 생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함부로 입김을 불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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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금지령’을 내렸던 터키 술탄, 무라드 4세(1612~1640). 커피하우스, 커피음용 금지뿐 아니라 커피무역선도 모두 바다에 수장했다.

카페人이런 곡절을 거쳐 무슬림들이 커피를 아끼게 됐군요. 그런 소중한 커피가 어떻게 유럽으로 유출됐나요?

돈이 된다 싶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상인이라고 하면, 누구일까요?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들의 명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베니스 상인들이 커피의 가치를 알고 1615년 처음으로 커피를 수입합니다. 당시 오스만제국이 아라비아반도와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이탈리아와 터키의 인연은 11세기말부터 거의 200년간 진행된 십자군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양측이 밀고 밀리는 전쟁 속에서 베니스 사람들은 주로 터키를 관할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교류가 잦았습니다. 자연스레 16세기부터 터키에서 대중화한 커피의 가치를 베니스 상인들이 먼저 알아보게 된 것이고요.

교황 클레멘트 8세의 선언

카페人유럽은 그리스도 국가들인데, 커피는 ‘알라의 음료’라고 소문났다면서요. 유럽인들의 거부감은 없었나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레반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탐험하는 유럽의 여행가와 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쓰디 쓴 검은 음료를 마시는 무슬림들의 모습은 매우 이채로웠을 것입니다. 그 음료에 관심을 갖기 충분했던 것이지요.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이 와인 대신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커피를 ‘아라비안 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유럽 사람들 중에서도 카페인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늘어갔지요. 16세기말에는 교황청에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의 음료를 마시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청원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라의 음료’를 그리스도인들이 마시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는 것이었지요.

카페人어디서나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네요. 교황청의 대응이 궁금한데요?

바로 이때 커피 역사에 남을 반전이 일어납니다. 당시 클레멘트 8세 교황이 되레 커피에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교인들도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교황은 커피를 맛보고는 “이렇게 향이 좋은 것이 악마의 음료일 리가 없다.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인들의 음료로 만들자”고 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교황이 허락한 뒤에 베니스 상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터키와 이집트에서 커피 원두를 가져와 팔기 시작했고, 멀리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아예 예멘으로 건너가 커피묘목을 몰래 빼내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커피 세계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호 계속)

글 | 커피비평가협회(www.ccacoff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