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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볶는 마을
커피향미를 찾아서 9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한국인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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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애호가들은 가끔 우스갯소리로 ‘진실처럼 알려진 2가지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하나는 “과테말라 커피가 스모키(Smoky)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 황제께서 커피를 드신 최초의 조선인이다”는 말이다.

두 가지 거짓말에 대하여

청국장을 먹고 나면 옷에 그 냄새가 배는 것처럼 화산재나 허공에 흩어진 연기 냄새가 커피나무가 자라는데 영향을 끼쳐, 더욱이 씨앗까지 스며들어 한 잔에 담긴다는 주장은 그럴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근거가 없다.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해도 딱히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화산활동이 과테말라보다 잦은 하와이에서 생산된 커피를 두고는 좀처럼 스모키하다고 하지 않는다. 커피에서 비롯되는 스모키한 뉘앙스는 산지나 품종이 발휘한다기보다는 로스팅을 통해 표현되는 면모인 것으로 보는 게 옳다. 마셔보지도 않고 산지의 특성 때문에 맛이 어떨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는 것은 우리의 관능을 왜곡시킨다. 그렇게 하면, 그 커피의 면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이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은 뻔한 이치다.

고종 황제가 러시아공관으로 옮긴(1896년 아관파천) 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게 됐다는 말도 ‘스모키 오류’만큼 잘못됐다. 이보다 12년 앞서 한양에 커피가 ‘식후 디저트’로 제공됐다는 기록이 있다. 과연 한국의 커피 시작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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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신 곳으로 알려진 덕수궁 정관헌.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by Lawinc82, wikimedia (CC BY-SA)

1840년대에 커피를 마신 조선 천주교도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1821-1846)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서 커피를 제공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1840년대 헌종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던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신학생들은 커피와 빵 같은 서양음식을 먹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다큐멘터리(평화방송 <성 김대건>)에 묘사된다.

17세기 예수회와 외방선교단은 커피를 선교에 적극 활용했다. 남미에서는 선교사들이 커피나무를 나눠 주며 자립을 도왔다. 이 시기에 마카오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식생활에서 커피는 에너지를 주는 음료로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커피는 한반도에서는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수입돼야 하는데, 커피에 관한 최초의 수입 기록은 1883년에 나타난다. 고종의 아관파천보다 13년 앞선 일이다. 조선은 1876년 문호를 개항하면서 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이 밀려들었다. 커피는 아마도 이들이 찾았기 때문에 공적으로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기록은 안타깝게도 우리 문헌이 아니라 일본이 1988년 펴낸 《외무성통상국편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외무성이 조선에 파견했던 영사들의 보고서를 묶은 <통상휘편>에 “1883년 8월 조선국 인천항 수출입일람표에 수입 외국산 물품품목 중에 ‘커피’란 항목이 들어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김순하 숭의여대 교수가 2013년 <한국 커피시장의 발전과정에 관한 문헌적 연구>란 논문을 내면서 커피애호가들에게 알려졌다.

한국 커피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보다 훨씬 깊숙한 곳까지 닿아 있는지 모른다. 김대건 신부보다 50여년 앞선 1780년대 정조 시대에 이승훈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선생은 40여 일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과 숙식을 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이 때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관점, 진실을 발견하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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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전파시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은 묻혀 있던 진실을 발견하는 눈이 될 수도 있다. 커피한국사를 깊이 더듬어 갈수록 설렘은 커진다.

이승훈 선생은 1785년 최초의 조선 교회를 세우고 정약용 선생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후에 처남 매부 사이가 됐는데, 이때 커피도 전해져 정약용 선생을 각성시키는데 쓰였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수원성을 축성하는 데에 사용된 거중기는 선생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인데, 서양의 학문이 전해지는 자리에 커피가 놓여 있었을지 모른다.

커피의 전파 가능성은 우선 서역과 한반도의 교역에서 찾아야 한다. 명나라(1368~1644)를 통해 실타래를 풀 희망이 보인다. 영락제는 원난성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정화를 환관으로 삼았다. 역사에 남은 최초의 대형 선단을 일컫는 ‘정화함대’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 대원정은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커피의 고향인 아프리카에까지 닿았다. 첫 번째 원정 규모만 따져보면 1492년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보다 10배에 달한다. 정화는 당시 62척의 함선에 2만 7000여명의 병사를 태웠는데, 오늘로 치면 1,500톤 규모다. 산타마리아 호는 150톤 규모였다.

메카를 찾아간 정화함대가 그 유명한 모카항에 정박하면서, 당시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던 커피를 배에 싣지 않았을까? 당시 커피는 위장병 치료제나 이슬람교도들을 밤새워 기도하게 만드는 귀한 ‘신의 음료’이었기 때문에 약재 품목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발견됐다는 소리는 아직 중국에서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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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성왕릉을 지키는 무인(武人) 조각상.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아랍식의 둥근 터번 등이 서역인의 풍모이다. 7~8세기 한반도는 커피 생산지 또는 교역지인 아라비아반도와 뱃길이 연결돼 커피가 전해졌을 수도 있다.

멀리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커피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예성강 하구에 있던 예성항에 점차 외국 상인과 사신들이 몰리면서 ‘벽란도’라는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한 것이 950년대인 고려 시대이다. 벽란도가 송(宋)을 비롯해 요(遼), 금(金), 일본 등 주변 나라는 물론 아라비아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고려는 송에서 비단과 차, 약재, 책 등을 수입했는데, 약재 중에 커피가 있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 중국에서 기록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에서 커피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2016년 12월 <중국 커피의 역사(A history of Chinese Coffee)>라는 책을 영어판으로 냈다. 중국이 뒤지기 시작한 커피 역사에서 송나라 때 아라비아 반도에서 커피를 가져왔으며 그것이 고려의 벽란도 상인에게 약재로 전해졌다는 기록이 나오길 소망한다.

그럼 한반도에 커피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고려 시대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통일신라와 당나라 때까지 닿는다. 신라 경주가 일본과 더불어 서역 땅인 이란(옛 페르시아)을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다는 사실은 여러 유물을 통해 입증됐다. 페르시아의 옛 서사시 <쿠쉬나메>에 신라에 망명한 왕자가 신라 공주와 혼인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신라 왕 무덤 앞 조각상의 비밀

1200~1300여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후반 고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영토를 지배했다. 삼국시대부터 페르시아와 교류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그 중 하나이다. 봉분 앞에는 무인(武人) 조각상 한 쌍(높이 257cm)이 서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 등이 전체적으로 서역인(西域人) 풍모이다.

괘릉에서 포항 쪽으로 50km 떨어진 흥덕왕(재위 826-836년)의 능에도 서역인 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흥덕왕은 당시 당나라의 서주에서 활약하던 장보고를 귀국시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케 함으로써 해상실크로드를 연 인물이다. 청해진은 당나라를 거쳐 멀리 아라비아까지 뱃길이 연결됐다. 이 바닷길을 따라 커피가 일찍부터 한반도에 닿았을지 모른다. 한반도의 커피 전파를 따라간 재미있는 상상은 신라시대까지 이어진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커피가 물보다 자주 마시는 음료가 됐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기원을 떠올리며 한국사에 빠져드는 것은 커피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행복이 아닐 수 없겠다.

글 | 박영순
사진 | 커피비평가협회(CCA, www.ccacoffee.co.kr)
박영순 님은 21년간 신문기자로서 와인,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 등 식음료를 취재하면서 향미에 몰입했습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향미 관련한 자격증 30여종을 비롯해 미국요리대학(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플레이버 마스터를 취득한 뒤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과 경민대 호텔외식조리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년 <커피인문학>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