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오늘의 카페
[드로잉에세이]

골목을 거닐며 만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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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4번 출구 앞에 있어요.” “두 정거장 남았어요. 그늘에 앉아계세요~” “전 오늘 좀 늦어요. 자리 옮기시면 메시지 남겨주세요. 찾아 갈게요^^” “어떡해요. 전 이번 주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어요. 마감이라 도저히 안 되겠어요ㅠㅠ 스케치 많이 하시고 맛난 음식도 드세요~”

매달 둘째 주, 넷째 주 목요일 두 시쯤 어김없이 휴대폰 메신저가 요란하다. 역시나 이번 모임에도 제일 연장자인 선생님이 일등으로 도착하신 모양이다. 환갑을 한참 지난 나이에도 열심히 활동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시다. 그림에는 초보나 다름없는 다른 회원들과 다르게 수채화로 전시회도 몇 차례 열 만큼 실력 있는 숨은 고수. 실력 있는 분이 왜 초보들의 모임에 나오시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모임 사람들이 좋아서요.” 그렇게 선생님은 간단한 스케치에 머물러 있는 우리 그림에 색을 입혀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도 한다.

이번 모임에서는 명륜동의 오래된 골목길과 ‘성북동 비둘기’의 주무대인 북정마을을 둘러본다. 한양도성 성곽 밑의 오래된 마을 골목을 거닐며 옛 시간을 느껴보고 그곳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자취를 찾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회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아가고, 식물에 일가견이 있는 회원 덕분에 골목을 거닐다 만나는 나무며 작은 풀꽃들의 이름과 특징을 알 수 있어 즐겁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거닐며 그 골목에 살았을 사람들과 삶을 생각하고 느낌을 나누는 일, 담장 안 널린 빨래를 보며 정겨움을 느끼고, 낡은 기와지붕에 싹튼 잡초를 보며 애잔한 감정을 함께 느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그리곤 각자 끌리는 장소가 나오면 우리 모임의 목적인 스케치를 한다.

‘스케치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시작한 지 어언 2년. 7명의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어슬렁어슬렁 골목길을 거닐며 스케치를 한다. 우리 모임은 2년 전 서울시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그리기 수업에서 인연이 시작됐다. 8회차 수업인 걸로 기억되는데 열 명 정도가 참여하는 소규모 수업이었다. 그리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보다는 한옥에 대한 설명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뤘다. 우리를 지도한 강사는 ‘자세히 보기’를 강조했다. 그릴 대상을 자세히 보는 것, 그리고 꾸준히 그리는 것이 그리기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했다. 수업의 마지막 두 차례는 정동 일대를 거닐며 빠르게 스케치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도 삐뚤빼뚤 그리는 실력인데 야외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그림을 그린 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수업 날 함께 차를 마시며 함께 계속 해보자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자고 고개들을 끄덕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우리는 2년째 해내고 있다.

30~60대 스케치여행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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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내력도, 사는 곳도, 심지어 나이대도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우리는 어느 것 하나 공통점이 없지만, 스케치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온 내력만큼이나 성향도 다르고 개성들도 강해 때로 삐그덕 거리지만 그림이라는 주제로 대동단결하고 있다. 만나는 횟수가 늘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다. 이렇게 다양한 회원들과 만나며 집과 회사만 오가던 내 인생도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을 그려 첫 모임에서 피카소라는 별명이 붙은 한 회원은 그림에 재미를 붙여 다양한 책을 읽고 다른 그리기 수업에도 참가하며 실력을 늘린 끝에 지금은 멋진 작품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 ‘그림’이 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며 늦게 발견한 그리기의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

그날 그린 그림은 골목길 투어를 마칠 때 장소를 떠나기 전에 모아 사진을 찍고 의견을 나눈다.

“좋은 데요?” “오~ 그림이 생동감이 있어요.”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했어요? 샘 성격이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 부족해 보여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동료의 칭찬에 우리는 계속 그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골목길의 간단한 스케치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조금씩 채색도 해보고 사람들의 모습도 그려본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서울의 북촌과 서촌을, 정동을, 염리동을, 창신동 봉제 골목을, 해방촌을 거닐었다. 서울에 적을 두고 살고 있지만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걸어볼 것 같지 않은 오래된 길들을 걸었다. 골목뿐만 아니라 궁궐들을 걸었고 수목원을 걸었다.

직장인으로서 한 달에 한 번도 참석하기가 쉽지 않지만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여행을 하듯 골목을 누빈다. 이제는 노안으로 그림을 그릴 때 안경을 썼다 벗었다 반복해야 하는 슬픈 현실, 그래도 내가 취미로 스케치를 한다는 것이, 열심히 생활하는 회원들의 모습에 자극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손위 회원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난 오늘도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며 한 장이라도 그려보려 노력한다.

여전히 내 그림 실력은 시작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비율이며 원근감도 엉망이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불쑥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과 그리고 싶을 때 바로 그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결석이 제일 잦은 불량회원이지만 ‘스케치여행’의 회원이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샘들~ 되도록 결석 안 할게요. 스케치여행, 오래도록 같이 해요~”

글 | 조경숙(카페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