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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먼 바다 봉삼 씨’ 이야기

그가 불러준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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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곁에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사실을 알려주려 먼 바다 봉삼 씨는 오늘도….” 

지금도 외우고 있는 에필로그다.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구절은 가물가물,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한다. 

다큐멘터리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다. 프로그램의 맨 앞에 나오는 프롤로그(prologue)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TV앞에 붙들어 두는 역할을 한다면, 방송 끝에 붙는 에필로그(epilogue)는 프로그램의 막을 내리고 총 결론을 정리하는 대목이다. 에필로그는 피디와 작가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정수다. 이 때문에 혼 힘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게 되는 게 에필로그다. 

벌써 10여 년 전 프로그램인데 에필로그를 외우고 있는 건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저 문장을 쓸 때의 감흥이 그대로 남아서다. 방송 글을 원고로만 보면, 참 별 거 없다. 
저 에필로그의 영상은 백령도 바닷가에 눈 먼 아들과 80대 노모가 바다에 앉아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눈 먼 아들은 엄마에게 하모니카를 불러준다. <섬 집 아이>란 노래다. 어머니의 일터였던 바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져 최근에는 도통 와보지 못한 바닷가에서 아들이 하모니카를 불어주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이때 아들에게 다정한 한 마디라도 건네련만, 다큐는 다큐! 애정 표현이 유난히 인색한 어머니는 추우니 들어가자고 성화다. 

눈 먼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때 아들의 인터뷰가 깔린다. “난 더 바라는 것도 없어. 이렇게 어머니랑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이야.” 그리고 이금희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로 에필로그가 들려온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대미를 장식한 저 글귀는 어머니를 업은 봉삼 씨가 나에게 불러준 글이었다. 한 달을 봉삼 씨의 삶에 빠져 살던 작가에게 던진 선물이었다. 그것은 곧 KBS <인간극장> ‘어디가세요 봉삼 씨’의 메시지가 됐다. 

백령도 맥가이버를 만나던 날

그때도 정말 ‘징하게’ 아이템이 안 잡혔다. 보통은 답사를 다녀온 뒤 구성안을 만들어서 촬영을 나가는데 이날은 데드라인에 걸려 주인공을 설득하러 백령도로 먼저 내려가는 도중에 허락이 떨어져 급하게 촬영이 시작됐다. 백령도 가는 방법을 적어 혼자 인천으로 가 백령도행 배에 올랐다. 국내 여행에서 그렇게 오래 배를 타본 건 처음이었다. 네 시간 쯤을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달려간 끝에 백령도에서 봉삼 씨를 만났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나일론 줄을 엮어 바구니를 만들고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작가라고 소개를 하니, 목소리만 듣고 나의 나이를 대번에 맞춰 버렸다. 그는 7살 때 바닷가로 떠밀려 왔던 탄피를 가지고 놀다가 시력을 잃었다. 시력을 잃어서일까? 그는 청각은 물론이고 촉각 등 다른 모든 감각들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인물이다. 나일론 줄을 가지고 바구니를 뚝딱 만드는 건 일도 아닌 봉삼 씨는 말 그대로 ‘백령도 맥가이버’였다. 솔직히 어떤 때는 ‘혹시 눈이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봉삼 씨는 예전에 백령도에 차가 많지 않을 때는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어도 뉘 집 차인지 다 알아맞힐 정도였다고 한다. 혼자 사는 노인들 전구 가는 건 물론이고, 가로등 배선이 잘 못 된 것도 모두 그가 고친다. 봉삼 씨는 동네에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는 홀어머니와 둘이 산다. 봉삼 씨 취재를 얼추 마치고 어머니 취재를 위해 어머니 방구들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5년 전 중풍을 맞아 반쪽 몸이 불편하다. 어머니에게 애처로움이나 고마움 등 아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끌어내려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물었지만, 당최 살가운 표현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어떤 설정이 생기면 프로그램이 재미있을까 궁리 끝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뭐 갖고 싶은 거 없으세요?” 어머니는 대뜸 몇 년 전 병원에서 본 건데, 다리가 네 개인 보행 보조기구가 있으면 다니기 좋을 거 같다고 대답했다.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 봉삼 씨의 손재주라면 그 정도는 거뜬히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봉삼 씨에게 귀띔을 했고 봉삼 씨는 그 정도는 문제없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 바퀴달린 지팡이를 만드는 이야기는 백령도 맥가이버 아저씨의 메인 스토리가 됐다. 

어머니를 위한 바퀴달린 지팡이

봉삼 씨의 ‘공작 시간’이 시작되었다. 리어카에서 바퀴 두 개를 떼고 용접을 하고 한참을 수선을 떨더니, 이상한 모양의 바퀴달린 보행 보조기구가 탄생했다.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고마워라 하면서 바퀴달린 지팡이를 받겠지만, 이건 다큐멘터리. 어머니는 정말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 캐릭터였다. 

아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바퀴달린 지팡이를 몇 번 끌어보더니, 덩치만 너무 크고 바퀴는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내동냉이 쳐버리고 만다. 어디서 못 쓰는 보행기 하나만 구해오면 될 것을 뭐 저런 걸 만드느냐고 타박이다. 그러고 보니, 그 동네 할머니들은 죄다 중고 유모차를 하나씩 구해서 지팡이 대신 그걸 끌고 다닌다. 봉삼 씨 어머니는 그게 필요한 거였고, 그거 하나면 그냥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뜻을 굽힐 봉삼 씨도 아니다. 봉삼 씨는 바퀴가 잘 굴러가게 다시 손을 보고 핸드백 같은 물건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도 만들었다. 거기에 노란 색으로 페인트를 칠했다. 몇 시간 사이 물건이 그럴듯해졌다. 세상에 다시없는 어머니의 지팡이가 완성됐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별 말 없이 아들의 바퀴달린 지팡이를 끌고 마실을 나갔다. 그러더니 아들 없는 데 가서 아들이 만들어 줬다고 자랑까지 늘어놓는다. 흔히 생각하는 그런 어머니의 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어머니였다. 

어찌 됐던 불 꺼진 방에서 바늘귀에 실 넣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봉삼 씨에 화려한 기술과 티격태격 거리며 노란 지팡이 만드는 과정이 꽤 재밌게 촬영돼 방송 분량 문제는 해결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메시지를 만드는 일, 촬영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속 깊은 이야기가 나왔다. 

봉삼 씨는 젊은 시절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인천으로 나가보기도 했었단다. 그러나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만 듣고도 어느 집 차 인줄 맞출 수 있었던 작은 섬 동네와는 딴 판이었다. 너무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서 그는 더 이상 맥가이버도 아니었고 할 수 있는 직업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섬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러저런 맘고생으로 어머니마저 쓰러진 것이다. 모든 게 제 탓이라고 생각한 봉삼 씨는 평생 어머니만 모시고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눈 못 보는 봉삼 씨에게만 보이는 것들

촬영이 늘어날수록 그 테이프를 보면서 작가들은 그의 삶에 혹은 그 사람에게 빠져들게 된다. 한참 봉삼 씨가 진짜 오라버니처럼 느껴질 즈음, 테이프 안에서 봉삼 씨는 맨 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트럭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봉삼 씨 뒤로는 노을이 서해바다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심히 앉아있는 봉삼 씨에게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

“사고로 눈을 다치지 않았으면 정말 멋있게 살았겠어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봉삼 씨는 대답했다. “그거야 모르지! 양아치가 됐을 수도….”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말을 잇는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거야. 그저 열심히. 뭐가 어땠으면 어땠을까, 그런 이야긴 의미 없어.” 

그 한 장면이 모든 걸 말하는 거 같았다. 휴먼다큐멘터리의 미덕은 이런 일상의 언어가 주는 감동이다. 꾸미지 않고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 않는데 인생을 통찰하고 있는 일상의 언어, 이웃의 언어! ‘누가 알아, 양아치가 되었을지.’ 이 한마디는 나에게 충분한 메시지가 되었고, 내가 눈 뜬 소경으로 살고 있다고 반성하게 했다. 트럭 뒤에 쭈그려 앉아 먼 곳을 보고 있던 봉삼 씨는 그렇게 나에게 에필로그를 불러 주었다. 

PS. 봉삼 씨는 방송 후 찾아온 착하고 예쁜 여인과 결혼을 해 잘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이 결혼한 걸 보고, 몇 해 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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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인간극장> ‘어디가세요 봉삼 씨’편은 2006년 10월에 방송되었습니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KBS 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 <VJ 특공대> <명작 스캔들> <TV 책을 보다> <EBS 다큐시선>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