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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자연요리연구가 임지호 선생

방랑식객이 차린 ‘위로의 밥상’

무제

방송 일주일 전, 입을 바짝 마르게 하는 시사회가 제작진을 기다린다. 영화 개봉 전 완성본을 관객이나 관계자에게 미리 보여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방송 제작에서도 시사회는 완성본을 만들기 전, 편집본을 가지고 제작진이 함께 보며 품평회를 하는 시간이다.

이때에는 동료 PD, 작가는 물론 제작사의 간부들과 방송사 담당 부장, 국장이 품평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고 목이 타는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과민성 대장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잘 끝나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불방 처리가 될 수도 있고 내용이 통째로 날아가거나 순서가 마구 바뀌는 복잡다단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날도 긴장된 마음으로 시사에 들어갔다. 대개는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어느 한쪽으로 의견이 좁혀지는 편인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전혀 인간극장스럽지 않다”는 쪽과 “신선하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해 주인공은 지금까지 인간극장의 주인공과는 좀 다른 인물이었다.

길 위에서 더 빛나는 요리사

그는 양평에서 커다란 한정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자연요리전문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송엔 거의 출연하지 않는 분이었는데, 삼고초려 끝에 허락을 받아 촬영을 한 인물이었다. 식당에서의 일상은 너무 단조로워서 뭔가 다른 컨셉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잡은 컨셉은 늘 어딘가를 떠나고 자연에서 만난 재료를 가지고 그곳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주는 그런 방랑벽이 있는 요리사였다.

사실 그는 사시사철 들로 산으로 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봄이 막 시작된 남도의 섬에서부터 전국 여행을 감행했다. 그것이 시사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게 기행프로그램이냐, 사람 이야기가 너무 적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간극장과는 좀 거리가 있는 접근이었고, 그것이 결정권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작팀은 그 컨셉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이 된 건 100권의 테이프, 그러니까 100시간 동안 찍은 내용에서 골라낸 것이기 때문에, 그 테이프를 찍은 피디와 그것을 미리 다 본 작가만큼 그 느낌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분명 길에서 더 빛나는 요리사였다. 서해 갯벌을 가다가 조개를 캐는 할머니들을 발견하면, 바지락을 이용해서 칼국수를 끓여주고 논일 하는 할머니들이 보이면 그들을 위해 자장면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뚝딱뚝딱 길 위에서 만든 음식인데, 먹는 사람마다 탄성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더 없이 행복해 한다.

그 행복한 순간을 만들 때 자연요리전문가 임지호 선생은 가장 빛났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이의 일상 깊이 들어가 그들의 희로애락을 펼쳐 보이는 기존의 인간극장과 조금 다르더라도 ‘길 위의 요리사’란 컨셉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누구보다 컸고, 그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오랜 방황의 시기를 거쳤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나이 지긋한 시골의 어머니들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밥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길 위의 삶엔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도 숨겨져 있었다. 그는 산과 들에서 문인들과 문화 관계자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주다가, 그의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고 싶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양평에 ‘산당’이라는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길 위의 요리사란 컨셉은 누가 뭐래도 그가 원조였고, 그것을 잘 살리는 것이 제작진의 책임이었다.

무제

고심 끝에 지은 제목 ‘요리사, 독을 깨다!’

다음 문제는 제목이었다. 일주일에 5일을 같은 제목으로 나가는 터라 매번 제목이 제일 중요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사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제목을 짓는다. 중요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컨셉을 담은 제목이던지, 아니면 어느 특징 하나를 잡아 그것을 제목으로 만드는 것이 관건인데, 많은 사람이 가장 충격적으로 봤던 건 그가 독을 깨는 장면이었다.

처음 양평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 그의 요리를 선보이는 자리, 열심히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장독대로 가더니 커다란 독 하나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시사 때까지 여러 번 본 장면이었는데도, 언제나 가슴이 철렁할 만큼 충격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다 비슷한 마음인지 동료 PD, 작가는 물론 본부장님, 부장님 모두 독을 깨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독을 깨는 모습보다 더 신기했던 건, 그 다음 작업이었다. 깨진 독 조각은 훌륭한 접시로 변신했다. 깨진 독 조각 위에 그의 특별한 음식이 올라가니 더 없이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그의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눈으로 보기에 훌륭한 작품이다. 나중에 그의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호텔 식당에 보조 조리사로 일할 때부터 수많은 전시회 브로슈어를 보면서 미적 감각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요리는 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공들인 것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제목 짓는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모두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일치한 터라 큰 무리 없이 <요리사, 독을 깨다!>로 제목이 정해졌다. 우리끼리는 ‘독을 깨다’라는 말이 가진 중의적인 의미에 크게 의미를 부여한 선택이었다. 단순히 그릇 하나를 만들기 위해 독을 작살내는 과감한 요리사라는 의미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편견을 버리게 하는’ 그런 한 인간을 소개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가 깬 많은 편견 중의 하나는 단연코 ‘풀에 대한 편견’이다. 세상에는 많은 풀이 있다. 그 중에 우리가 식용으로 먹는 풀은 몇 개 안된다. 그런데 길 위에서 요리를 하는 임지호 선생에게는 먹을 수 있는 풀이 너무도 많다. 그는 길을 가다가 담벼락에서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을 뜯고, 이름도 모르는 바다풀들을 마구 뜯어서 요리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낙엽을 절여 소스를 만들기도 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끼조차도 진귀한 요리로 재탄생시킨다. 많은 풀들은 선조들이 직접 먹어보고 때로는 독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얻는 지식이고 이것이 구전으로 전해져 왔지만, 많은 부분이 잊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길에서 요리를 배운 요리사는 그래서 더 많은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무제

지친 그대를 위로하는 선생의 밥

인간극장에 출연한 후 그는 더 유명해졌고 그 프로그램을 방송했던 프로듀서는 에서 ‘방랑 식객’이란 이름으로 그를 다시 TV 앞에 세웠다. 인간극장에서 ‘길 위의 요리사’ 컨셉을 더 강조해 ‘방랑식객’이란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잊지 못할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요청을 하면 연예인들과 임지호 선생이 함께 방문해 그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연의 대부분은 고생하는 엄마, 혹은 아버지 혹은 자식을 위해 음식을 해달라는 것이고, 그들은 기꺼이 거기에 가서 요리를 한다. 그 음식은 언제나 위로의 음식이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을 선사하는 요리다. 그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하는 출연자들의 표정은 늘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의 음식에는 사람을 위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길에서 요리를 배웠고, 자신이 그리도 그리워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요리를 한 덕분이며, 또 세상의 어떤 선입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용감함 때문이리라. 그래서 괜스레 슬퍼지거나 외로워지는 날엔 임지호 선생의 밥이 먹고 싶어진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그것이 알고 싶다> <명작 스캔들>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