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빠란떼, 앞으로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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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은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걷는 길이다. 함께 걷다보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동행이 된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며칠을 같이 걷는다. 산티아고까지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단조로운 평원이 끝없이 이어진 메세타 고원 지역이라 앞뒤로 걷는 순례자들이 꽤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내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진다. 까마득하던 배낭뒷모습이 슬슬 다가오고 풍경처럼 내 뒤로 스르르 흘러갔다. 

순례자들의 인사 “부엔 까미노”

한 친구와 꽤 오래 같이 간다 싶어서 흘낏 보았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훤칠한 청년이다. 나무로 깎은 순례자 지팡이를 짚고 걷는 데 느린 내 걸음과 묘하게 속도가 맞았다. 약간 다리를 절었다. 눈이 맞자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순례자들의 인사다. 스페인어 그대로 옮기면 ‘좋은 길!’이지만 ‘평안한 순례길 되기를’ 정도의 인사말이다. 

부엔 까미노로 화답하자 대번 질문이 날아온다. 웨얼 아유 프롬? 코리아. 오, 코리아, 쏘 매니 코리언 인 디스 웨이. 와이 매니 코리언 컴 디스 웨이? 아이 돈 노…. 

그래 잘 모르겠다. 나도 궁금해. 왜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 멀고 먼 유럽하고도 스페인, 천년 훌쩍 넘어가는 순례길에 와있는 걸까. 음… 아마도, 내 생각인데, 한국이란 나라가 사는 게 좀 피곤해. 아니, 어쩌면 한국 사람이 원래 좀 종교적이라.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걷는 걸 좋아해. 또 유명한 사람이 갔다 왔다 하면 따라 하기 좋아해. 

서툰 영어로 이것저것 말하려니 힘이 든다. 그래도 끄덕끄덕하는 걸 보니 알아듣는 듯하다. 자, 나도 질문. 넌 어디서 왔니, 왜 이 길을 걸어. 다리는 괜찮나? 
청년의 이름은 루치아노라고 했다. 유일하게 스페인의 해외영토로 남은, 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카나리아 제도에서 태어났고 여행을 좋아해서 모로코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를 다 다녔다고 한다. 문득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었다고 했다. 다리는 며칠 좀 무리했더니 탈이 났는데 천천히 걸으면 괜찮다고, 걷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여자 친구가 자기를 위해 먼저 가서 다음 마을에서 숙소 잡고 기다린다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여자 친구를 만드는 멋쟁이를 직접 보는군. 대답이 끝나자 서로 노래 하나씩 부르자고 제안하더니 다짜고짜 스페인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키만큼 목소리도 크다. 박자와 음정을 살짝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루치아노가 노래가 끝나자 내 입에서 아리랑이 툭 나온다. 나 원 참, 산티아고 길에서 아리랑을 부를 줄이야. 

그렇게 몇 곡 오가다 ‘라 쿠카라차’에서 합창이 되었다.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출신 청년과 동쪽 끝 반도에서 온 한국 청년(?)이 멕시코 민요를 함께 부를 수 있다. 학교 음악시간의 쓸모는 이런 거군요. 

그렇게 유쾌하게 같이 걷다 궁금한 게 툭 나왔다. “루치아노, 울트레이야, 라는 말을 알아?” “아니, 몰라” “그렇구나. 라틴어라서 모를 수도 있겠다. 부엔 까미노만큼 산티아고 길에서 많이 쓴다고 들었는데, ‘마음에 희망을 품고 전진하다’라는 뜻이야. 같은 뜻의 스페인어가 있을까?” 

“빠란떼!” 지체 없는 대답이다. ‘앞으로 나아가다, 신념을 품고’라는 뜻이란다. 긴 팔을 앞으로 주욱 내 뻗으며 나를 돌아보고 “빠란떼”라고 다시 말한다. 팔을 내리며 그가 담담히 덧붙인 말이 가슴을 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야.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도움이 되지.” 문득 물어본 말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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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앞으로 쭉쭉, 신념을 품고...’

어느새 마을 어귀에 도착했고 루치아노는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더니 미리 잡아놓은 숙소로 간다고 했다. 나는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빠란떼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폰으로 검색을 했다. 요즘 산티아고 길은 숙소마다 와이파이가 터진다. 길을 알려주는 표식인 노란 화살표를 잃어버려도 괜찮다. 폰으로 구글 맵을 띄워 길을 찾는다. 8년 전 산티아고를 걸었던 친구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어처구니 없어한다. 그건 내가 알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니라고 한다. 어쨌건 지금은 그렇단다. 

자, 그럼 ‘빠,란,떼’를 쳐보자. 검색결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 철자 물어보는 것을 까먹었다. 빠, 면 첫 글자가 B일까 V일까 P일까. 한참을 고생고생 찾아보니 슬랭(slang; 속어)이다. 스페인어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랬지. 

찾고 나니 뉴욕의 푸에르토리칸 청소년 커뮤니티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 다른 커뮤니티에서 발행한 신문의 제목이기도 하다. 뉴욕의 빈곤층을 이루는 푸에르토리칸들이 자신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 주장을 알리는 신문의 이름. 어쩌면 꽤 정치적인 용어가 아닐까 싶다. 리키 마틴의 노래 <마리아>에 잠깐 나온다는데, 아무튼 일상적인 어휘는 아닌 듯싶었다. 

루치아노의 아버지는 어떻게 이 말을 알았을까. 그리고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을까. 문득 루치아노의 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 빠란떼. ‘루치아노,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라.’ 루치아노가 내게 했듯이 팔을 앞으로 뻗으며 말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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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의 인연이 노래로

이 말을 품고 며칠을 걸었다. 어느새 노래가 되어 풀려나왔다. 신기하게도 영어가사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기적이 흔하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노래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같이 부르기에 좋을 듯했다.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하자 길에서 루치아노를 다시 만났다. 그렇게 툭, 만날 것만 같았다. 한참 서로 등을 두드린 뒤 팔을 풀고 말했다. “네가 알려준 빠란떼로 노래를 만들고 있어. 다 되면 들려줄게.” “오 진짜? 멋진 걸. 꼭 보내줘.” 
돌아와서 노래를 완성했고 얼마 후 메일을 썼다. “너의 말을 노래로 바꿔 보낸다. 또 어딘가를 성큼성큼 걷고 있을 루치아노에게 기분 좋은 노래가 되면 좋겠다.” 
공연 때 무모하게 관객과 같이 배우고 불렀다. 생각보다 쉽게 따라 불러서 살짝 놀랐다. 나는 박수와 함께 덧붙였다. 어쩌면 여러분 인생 최초의 스페인어 단어가 들어간 노래를 부르신 거예요. 가끔 힘들 때, 스스로에게 말해주세요. 빠란떼, 앞으로 나아가다. 마음엔 신념을 담고, 란 뜻입니다.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배운 말이죠. 

빠란떼 Pá lante

(후렴)
Pá lante oh Pá lante Pá lante de Santiago. 
Yellow arrows show your way. Pá lante oh Pá lante. 

1. 
나 어릴 적 언제나 들었지 늘 평화로웠던 내 마음의 소리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 어지러운 삶 속에 잊고 말았네

When I was young. I heard the voice 
Don't be afraid. I was in deep peace. 
Time gose by. I got older. 
My life so dizzy. I've lost the peace.

2. 
어느 날 아침 난 다시 들었네 산티아고로 오렴 난 믿을 수 없었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가방을 꾸리고 공항으로 달려 나 지금 여기에 

One day morning, I heard the voice again. 
Would you come to Santiago. It was incredible.
But I canceled my meetings, and packed my backpack.
I left for the airport and now I'm here. 

3. 
걷고 또 걸었지만 왜 여기 온 걸까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해했던 날들  
이제는 알 것 같아 이 길의 비밀을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I've been walking. walking every days. 
but why i'm walking question in my mind. 
Now i know that. Nothing has changed. 
but Everything has changed. it is the secret of the way.    

_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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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