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산티아고 길노래

내 인생 첫 번째 영어노래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산티아고 길을 걸어야겠어.”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응, 좋아. 세상 사람은 딱 둘로 나뉘지. 산티아고 길을 걸은 사람과 걷지 않은 사람.” “응, 맞아, 세상 사람은 딱 둘로 나뉘지. 점심을 먹은 사람과 아직 먹지 않은 사람.”

그 친구를 만나서 같이 지낸 탓이다.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준비는 수월했다. 친구는 정말 필요한 게 무언 지, 또 어떤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는 지 꼼꼼히 알려주었다. 배낭에 책을 잔뜩 넣고 매일 한 정류장씩 걷는 거리를 늘려갔다. 넉넉지 않은 여행경비 외에는 별 걱정이 없었다. 그것도 어찌어찌 주변의 도움으로 얼추 메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하루의 노래>라는 노랫말을 썼다.

오늘 내가 산 만큼, 걸은 만큼, 지은 만큼, 풀려나오는 내 하루의 노래
내 인연 닿은 사람들 내 발길 닿은 풍경들
그 사이 떠오른 옛 기억들과 피어난 꿈과 바람들
오늘은 오늘의 노래로 남김없이 짓고 잠을 청해요
내일은 또 무얼 만날까 절로 짓고 또 풀어내겠네 내 하루의 노래

 

"어때? 걸으면서 이렇게 매일 노래를 쓰면 근사하겠지?” 노랫말을 본 친구가 짧은 침묵 뒤에 말했다. “일단 하루만 걸어보시죠. 쓰러져 주무시기 바쁩니다아.” 나는 배낭에 책을 몇 권 더 집어넣었고, 걷는 코스에 야산을 하나 추가했다. “그보다 같이 걷는 동료 순례자들에게 들려줄 노래를 준비하는 게 어때? 대체로 영어는 알아들으니 영어 노랫말에 곡을 붙여봐.”

이슬람 시인 루미의 시를 고르다

괜한 일의 대가는 이런 거구나 깨닫는 동시에 욱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내가 영어라고 곡을 못 붙일 것 같으냐. 어차피 같은 사람이 쓰는 말이다.’ 연타가 터진다. “루미의 시가 딱 좋겠네.”

‘그래, 루미(J. Rumi)는 나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다. 13세기에 활동하던 이슬람 시인이지. 신비주의 경향을 가진 아름다운 시를 잔뜩 썼다. 기독교 성지 순례 길을 가면서 이슬람 시인의 시에 붙인 노래를 준비하라는 거지? 그래, 아주 딱 좋겠다.’ 인터넷을 뒤져서 루미의 시가 모인 사이트를 찾았다.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길거나 해석이 안 되는 시는 고를 수도 없었다. 적어도 내용은 알아야 곡을 붙일 수 있으니까. 어찌되었건 영어 노랫말에 곡을 붙이는 건 처음이란 말이다. 가장 쉬울 것. 그게 내 유일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고른 노랫말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When the rose is gone and the garden faded.
you will no longer hear the nightingale's song.
The Beloved is all; the lover just a veil.
The Beloved is living; the lover a dead thing.
If love withholds its strengthening care,
the lover is left like a bird without care,
the lover is left like a bird without wings.
How will I be awake and aware
if the light of the Beloved is absent?
Love wills that this Word be brought forth.

장미는 지고 정원은 시들어 / 밤 꾀꼬리의 노랜 이제 듣지 못하리
당신이 모든 것 난 단지 비출 뿐 / 당신품 안에서 나 살아 숨쉬니
그대 사랑 안에 서있으니 / 그 안에서 나 굳세지네
그 사랑 없이 날개 잃은 새와 같지 / 저 어둠을 지우는 빛 없이
어찌 나 홀로 깨어 있을까 / 그 사랑만이 모든 걸 이루니

- 《마스나위(Mathnawi)》 I, 23-31 -

 

걸으며 염불하듯 한 문장씩 중얼거렸다. 루미의 시를 번역한 책을 찾아보니 내용도 대충 이해가 됐다. 좀 거룩한 내용이긴 했지만 내 눈에 들어온 이유가 있겠지. 떠나기 며칠 전 얼추 노래가 되었다. 혼자 말했다. 나쁘지 않아.

동료 순례자들에게 처음으로 들려주다

산티아고 길 첫 날. 가장 험하다는 28km의 나폴레옹 루트를 넘었다. 프랑스의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스페인이다. 부슬비가 왔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고 두터운 안개가 꼈다. 앞서 걷는 순례자의 등이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진다. 10kg이 훨씬 넘는 배낭을 메고 낮선 산길을 걷는다. 길은 미끄럽고, 천지에 워낭 소리다. 소는 안개 사이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천신만고 끝에 숙소가 있는 론세스 바예스 수도원에 도착했다. 씻고 먹고, 기절하듯 잤다. 잠들기 전 중얼거렸다. 그래 ‘하루의 노래’라니, 꿈이 야무졌어. 다음 날은 쨍하니 맑았다. 딱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내리막 산길이 이어졌다. 마침 그 지역의 대형 이벤트, 산악 마라톤이 벌어졌다. 뛰어오는 건장한 선수들에게 길을 비켜줘야 했다. 산길에 발이 아팠던 나는 매번 길옆으로 비켜주는 게 더 힘들었다. 이러느니 뛰고 만다, 내가. 10kg이 훨씬 넘는 배낭을 메고 산길을 달려 내려갔다.

길 가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환성이 터진다. 순례자가 뛴다. 내가 좋아서 이런 게 아니다. 결승선은 ‘주비리’라는 마을에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있는 그 마을의 결승선을 통과하고 바로 탈진했다. 덤으로 길도 잃었다. 물어물어 그 마을의 숙소를 찾아가 짐을 풀고 역시 씻고 먹고 잤다.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사흘 째, 평범히 잘 걸어 평정을 되찾은 내가 도착한 곳은 ‘트리니닷 데 아레(Trinidad de Arre)’라는 도시. 천년이 넘는 성당이 있다. 그 입구에 앉아 나는 이 노래를 혼자 불렀다. 핸드폰으로 녹음해서 친구에게 보냈다. 요즘 산티아고 길에는 와이파이가 터진다. 울림이 좋다는 답이 왔다. 다음 날 마침 기타가 있는 숙소에서 동료 순례자들에게 “It's my first song based on english lyric”라고 말하며 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마치고 표정들을 살폈다. 나쁘지 않아, 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 첫 번째 영어가사노래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 <카페의 서재> 제2권 《산티아고 길노래》 중

 

책 소개 살펴보기

글 | 안석희
안석희 님은 ‘유인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바위처럼>을 비롯해 많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여행에서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고, 최근 《산티아고 길노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