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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에세이 세 편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 2016년 1월 15일 타계한 신영복 성공회대교수가 남긴 여러 저작 중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20년 1월, 신영복 선생 4주기에 맞춰 《신영복 평전》(돌베게)이 출간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무제

선생님,
먼발치에서 선생님이 떠나시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여러 일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시면서 선생님은 영면에 드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비록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만, 다행스럽게도 저에게는 선생님이 남겨 주신 글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갔지만 그나마 글이 남아 저를 위로합니다. 이 무슨 아름답지 못한 역설인지 모르겠습니다.

길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신영복 선생님,
제게 선생님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먼 길을 떠나신 분과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인연을 말하는 것은 감성의 영역이지 이성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께서 제게 알려주신 이성의 힘에 대해 추억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하셨지요. 머리는 냉철하고 균형 잡힌 합리성이 자라는 근원입니다. 가슴은 그렇게 키운 합리성과 판단력이 올바른지, 정의로운지, 또는 편협하지는 않은지 걸러내고 돌이켜보게 하는 성찰이 비롯되는 곳입니다. 머리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개념과 논리로 분석하는 영역입니다. 이는 확장의 영역이고 정복과 소유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반면 가슴은 그렇게 얻은 삶의 도구적 수단들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데 올바르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이해하는 영역입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시작된다’고 하신 역설은 어떤 경구보다도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만들어낸 성숙한 정신의 표현입니다. 길이 끝난다는 것은 기존의 세계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문화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모든 문명에는 시작과 종말이 있었지요. 타자가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 주체와 자아를 획득할 때 새롭고 창의적인 자신의 세계가 창출되는 거지요. 길이 끝났을 때,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진정한 자기 것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감성은 그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원천입니다. 앞선 세대의 사람들이 만든 타자의 세계는 안정되고 편안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핍을 채우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롭게 발걸음을 옮겨 나가는 겁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그렇지요. 기성세대를 극복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바로 예술이고, 산업이고, 학문이며, 발전입니다.

노인들이 길을 나서며 ‘관광’을 떠날 때, 젊은이들은 없는 길을 찾아 뚜벅뚜벅 자신만의 방식과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는 ‘여행’을 떠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정이 ‘관광’이 아니고 ‘여행’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제 생각이 얼마나 반듯하게 여물고 건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이런 사색의 바닥에는 선생님의 여러 글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통념을 극복하는 법

선생님,
선생님의 여러 에세이 중에서 제가 첫머리에 두는 글은 여행 에세이 <로마 유감>입니다. 20년 20일. 선생님이 수감생활을 하셨던 세월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간입니다. 20년이면 갓난아기가 성년으로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매워서 떡볶이를 먹지 못하던 제가 훌쩍 자라나 글을 익히고 배워 어떤 소녀에게 서툰 연애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었던 시간입니다. 이 기나긴 시간의 웅숭깊음을 무슨 말로, 어떤 비유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 선생님께서는 대학을 두 번 다니셨다고 하셨지요. 한 군데는 우리가 아는 대학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셨던 경제학자이십니다. 또 한 군데의 대학은 감옥이 있는 교도소입니다. 사람을 알고 살아있는 지식을 익히고 흉내낼 수 없는 성찰을 획득하신 곳입니다.

그 긴 시간의 수감을 끝내고 선생님은 세계를 여행하십니다. 《더불어 숲》에 실려 있는 <로마 유감>은 저에게 통념을 볼 수 있는 시선의 날카로움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알게 해 준 글입니다. 개선장군의 말발굽 소리는 전장에서 죽은 자들의 신음이 만들어 내는 소리일 수도 있다는 성찰은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위대한 문명 앞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던 노예들의 내지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통념에 대한 뼈아픈 성찰은 앞으로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전해줄 것입니다.

‘로마는 마지막으로 보아야 하는 도시’라고 합니다. 장대한 로마 유적을 먼저 보고 나면 다른 관광지의 유적들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의 자부심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제일 먼저 로마를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반성할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문명관(文明觀)이란 과거 문명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략)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입니다. 많은 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정복전쟁이 정지될 때 무너지기 시작하며, 로마 시민이 우민화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로마가 로마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 그때부터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콜로세움은 이 모든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탑이었습니다.

- <로마 유감> 중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선생님,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한 학생이 책 제목을 잔뜩 적어 와서는 어떤 책을 읽을지 권해달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함께 물어왔습니다. 사실 난감했습니다.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왜 그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지 못한 책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가 그런 자격이 있는지부터가 당혹스러웠습니다. 얼버무리며 ‘고전이란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농담 아닌 농담처럼 건넸습니다.

고전이 왜 중요한지는 아직 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몇 백 년 전의 책이든 불과 지난 세기의 책이든 책의 존재는 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시대와 세대가 바뀔 때마다 당대의 사람들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그 책에게 물었을 겁니다. 시대와 역사가 달라진 순간에도 그 책이 읽혀야 할 가치에 대해서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책들이 다음 세대들이 물었던 가치에 대해 답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가치가 바뀐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에 대해 그 책들은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었고, 그렇게 세월을 이겨온 인류의 유산이라는 점입니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책들이 반드시 당대의 최고의 지적 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사의 전개 과정이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모든 미래 지향 역시 지금까지의 역사를 디딤돌로 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독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여정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더 좋은 책, 더 좋은 왕도는 없습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미 새의 체온과 바람과 물 그리고 수많은 밤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어느 날 아침 문득 빛나는 비상으로 날아오릅니다. 고뇌와 방황으로 역경의 어느 무심한 중도 막에 그때까지 쌓아 온 회한과 눈물이 어느 순간 빛나는 꽃으로 피어오릅니다.
독서도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고뇌와 성찰의 작은 공간인 한 언젠가는 빛나는 각성으로 꽃피어 나기 마련입니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 <책은 먼 곳에서 찾아온 벗입니다> 중

무제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가르침

선생님,
선생님께서 직접 써 주셨던 글씨를 보고 있습니다. 액자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라는 선생님 고유의 어깨동무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자리에서 개인적인 경험과 인연을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여러 글들을 통해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과 가르침은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저에게 올바른 지침을 주실 것입니다. 스승 한 분 모시기 어렵다는 세상입니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느끼게 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책이 된 《강의》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려 봅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나목의 가지 끝, 삭풍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실을 씨과실이라고 한다고 하셨죠. 석과불식이란 씨과실(碩果)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새봄의 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석과를 새로운 싹으로 틔워내고, 나무로 키우고, 그 나무들이 비로소 더불어 숲이 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젊음과 일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나라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이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저와 같은 소인배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세상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시는 듯 더 큰 성찰과 깨달음으로 저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선생님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와 어려운 한문 문장을 번역하듯 단어 하나하나를 꿰매어 나가던 선생님의 말소리가 그립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역경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