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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카페

그대에게 가는 먼 길

무제

이른 새벽입니다.
지금 당신은 무얼 하나요?
당신이라는 말을 낮게 다시 불러봅니다. 아무리 불러 봐도 참 좋은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당. 신. 이라고 부르면 금세 웃으며 제 옆으로 올 것 같은 시간입니다.

유리창에도 새벽은 스며들어 이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한나절 모든 것을 투영시키며 다른 존재를 위해 살았던 유리창에도 이제 색깔이 드러납니다. 비단 어둠의 색만은 아닙니다. 보는 자와 비추는 자의 관계가 드러내는 내면의 색입니다.

자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새벽의 유리창은 신비한 힘으로 그들을 비춰줍니다. 깨어있어야만 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은 늘 우리를 반성의 시간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새벽에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시간의 소금입니다.

지금 저는 당신 생각을 합니다.
몇 가지 표정이 떠오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을 알게 되기 이전의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이제껏 저는 이기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기적입니다. ‘다시 만난다면’이라니요? 사람과의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돌이킬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이렇게 새벽의 유리창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 따위는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자신입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기반성입니다. 돌의 내부는 모래가 아닙니다. 부서지는 것들은 덩어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바꿔야 했습니다. 사랑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 것 같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아 잃어버리고 흘려버린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운 나머지 당신을 ‘진짜’로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좁았고, 너무 급했고, 너무 자기방어적이었습니다. 좀 더 준비하고 당신을 만났더라면, 당신의 그 좋은 모습들을 저 새벽의 유리창처럼 모두 다 담아내고 끌어안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세상을 삐딱하게 질투만 했습니다.

새벽은,
시간의 샘물입니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의 출발점입니다.
그리하여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멀리 가는 발걸음입니다

당신과 함께 찾았던 맑은 샘물이 흐르던 남쪽 지방의 산길이 생각납니다. 물은 언제나 순환하는 시간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흐르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다시 처음의 곳으로 흘러 되돌아오는 건 시간과 물길입니다. 샘물은 흘러 시냇물로 다시 흐르겠지요. 물길은 모여 모여 강으로 나와 바다를 향해 갑니다. 바다는 구름과 비로 다시 만나 산길 옆을 흐르던 샘터에 물방울로 내려 고이겠지요.
제 사랑은 어디쯤 와있을까요?

지금 여기, 많이 그리워했지만 털끝만치도 스스로 사랑한 한 적이 없는 사랑. 당신의 가슴에 피멍을 남겼지만, 제 손톱 밑에 박힌 가시 때문에 생긴 생인손만 아파했던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저의 시간을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제가 당신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좌표를 생각해봅니다. 어느 날, 몇 시의 어느 장소였겠지요. 그 지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저를 늘 안타깝게 합니다. 그리움이란 말은 시공간의 축에 당신을 얹어놓는 일입니다. 그리움은 하나의 명사가 아니라 완전하지만 안타까운 하나의 문장입니다.

물길이 작은 곳에서 시작해 바다를 향해 먼 길을 가듯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위해 첫걸음을 떼봅니다.

한적한 샘터에 앉아 가만히 내려다보면 작은 벌레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살고 있습니다. 물방울을 물어 나르던 새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 벌레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분주해집니다.
아무리 작은 삶도 실은 분주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제 사랑은 당신을 지나고서야 더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시내를 거쳐 강가에 이른 물방울은 강아지풀처럼 흔들리며 흘러갑니다.
강을 건너온 바람이 풀씨를 만나듯 제 눈빛은 그대를 그렇게 만났습니다. 풀물처럼 번져오던 사랑은 푸른 따뜻함이 되어 강가를 감싸고돕니다. 강물이 흔들리듯 저토록 흐르고 또 흘러가려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렇게 자신을 씻어 내면서 흘러가도 남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다시 당신을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제 그대를, 있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수천의 파도가 바다로 몰려와 힘껏 부서지고 있습니다.
모든 삶의 과정을 다 알아차렸지만 아직도 어깨에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파도는 어쩌면 삶의 고통을 껴안고 몸부림치던 어제의 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부서진 파도들이 비로소 편안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물방울이 여기까지 오느라 걸린 시간과 공간을 떠올려보면, 지금이 가장 편안한 모습입니다. 이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순간을 기다리는 듯합니다. 공기와 바람이 만드는 구름을 향해 모든 것을 이룬 듯한 자세로 누워 물방울은 이제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대여,
제 사랑도 저 파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더 부서지고 부서져 비로소 편안함을 얻을 때,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이제 첫 걸음을 떼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까지, 새벽의 푸른 불빛 하나 느끼지 않는 편안한 곳에서 그대는 그대의 자리를 지키고 계시길 바랍니다.

 

무제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