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공감 월간 카페人
메뉴열기
相想共感
카페人2020.07 | Vol.8
웹진 구독신청
지난호보기

함께하는 기업

  • 1킬로커피
  • 일온스
  • 라바짜
  • 나이스커피시스템

발행처 ㈜벼리커뮤니케이션
발행인 손인수
에디터 오형석 조경숙 김정현
디자인 이동휘

* 월간 <카페人>의 콘텐츠는 발행처인 (주)벼리커뮤니케이션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메뉴닫기
월간 카페 2020.07 | Vol.8
월간 카페人  /  제6호  /  내 마음의 카페
내 마음의 카페
부치지 못한 편지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나도 폐결핵에 걸리면 어떨까, 그러면 네가 얼마나 아픈지는 알 수 있질 않을까. 나도 너와 함께 같이 아프고 싶어.”

스무 살이라는 나이

이 철없는 말들을 해맑게 쏟아내던 당신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습니다. 결핵을 앓으면서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저로서는 장난스러워 보이는 당신의 말이 싫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내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겨울, 저는 아버지도 앓았고, 형도 앓았던 형벌 같은 병과 함께 시들어가는 제 청춘을 습기 나는 방에서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기뻐할 것도, 그다지 슬퍼할 것도 없이 왜 나는 아직도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을까, 이 세상 어디를 따라가면 세월을 빨리 훔칠 수 있을지를 생각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유배 온 것 같던 시간들

그때는 간절하게 빨리 늙고 싶었습니다. 늙어서, 감당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병을 이기기 위해 먹어야만 했던 알약들은 정말 독했습니다. 약기운을 못 이긴 육체는 잠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어 버리면, 꿈에서도 세상은 늘 멀리로만 도망가는 게 보였고, 하루하루는 정말 비루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잠에 지치고 지쳐 고개를 들어보면 바깥은 어느새 밤이었고, 저는 원하지도 않은 밤하늘을 작고 뿌옇던 창문 틈으로 힘없는 밥숟갈을 들 듯 보고 있어야 했지요. 그때 당신은 건강하고 명랑한 소녀였고, 혼자서만 세상을 멀리하고 유배를 온 것 같던 저는 온갖 위악을 다 떨며 시간을 견디고 있었지요.

나이 든 사랑에 대한 솔직함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살아하는, 사람들, / 사랑하는 사람들은, / 너, 나 사랑해? / 묻질 않어 / 그냥, 그래, / 그냥 살지 /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 낮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와 어둑어둑한 기슭, /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지 /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지 / 이제 내가 할일은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일 것이야 /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_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전문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가 처음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떠오른 글이 바로 이 시였습니다. 시의 한 구절처럼, 십 수 년 전, 당신도 내게 그렇게 말했었죠. 스트렙토마이신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에탐부톨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당신은 내게 시에 나오는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후에 이 시를 우연히 읽게 되면서 저는 그날의 상황이 선명히 떠오르더군요. 시의 내용처럼 이제 십 수 년이 지난 요즘, 당신을 만나기로 한 오늘 저는 인사동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떻게 변했을까,
알아볼 수 있을까,
세월이란 게 사람을 어떻게든 변하게 해놓고야 만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며 도착한 종로경찰서 앞에는 오후의 해가 막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고등학교 교정이 기억나나요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대학에 부속된 건물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의 캠퍼스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호수가 있었지요. 인공호수였지만 꽤나 규모도 컸고 운치도 있었습니다.
그 호수의 이름을 딴 대학 주최 백일장에 우리가 같이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은 산문을 썼고 저는 운문을 썼었습니다. 운 좋게도 상을 받고 우리는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음료수를 마셨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한 장면은 떠오르네요. 들꽃을 꺾어주면서 제가 당신 얼굴이 못났다고 놀렸던 기억이 납니다. 오월이었지요. 화창했던 날만큼이나 아직도 제게는 환하게 기억나는 모습입니다.

아주 오랜 만의 만남입니다

인사동의 오후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퇴근 시간이 맞물리면서 겨우 약속시간을 맞춰 도착한 제가 두리번거리며 당신을 찾습니다. 십 수 년 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다 우연히 서로의 연락처를 알고도 한동안 서로가 망설였지요. 당신이 보내 온 문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친구들 통해 소식 들었어. 잘 살고 있다길래,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왜 아직도 네 이름을 들으면 걱정부터 앞설까.”

어렵게 약속 시간을 잡고 만나러 오는 동안 많은 시간들이 지난 것을 확인해 봅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변했는지는 사실 전 별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궁금했던 건 따로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도 글을 쓰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당신은 참 글을 잘 썼습니다. 안 읽은 척 했지만 쓴 글들을 오래오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의 관찰력은 특별했습니다. 사물 하나를 쓸 때도, 사람 하나를 묘사할 때도 어린 나이답지 않게 참 선명하게 그렸었죠. 과연 지금도 그 문재를 키우고 있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던 터라 저는 그런 게 궁금했습니다.

나이듦에 대해 우리는 말을 아꼈습니다

금세 서로를 알아본 건 지나간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지요. 그리고 우리는 식사를 하며 몇몇 추억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들과 그 성과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서로의 나이듦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당신도 그 시간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겁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알았을까요? 식탁 하나를 두고 밥을 먹고 있는 성인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요.
시치미 떼고 앉아 우리는 마치 얼마 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않아있었지요.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잠시 낯설어 보이기도 한 모습이었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세월이 흘리고 간 변화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어졌습니다. 한참 얘기가 이어지다 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 당신은 제 이름을 부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지요.

“이제 아프지는 않니?”

저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다고 말이죠.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된다고 말이죠. 어쩌면 제가 당신을 다시 만난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같이 아파주겠다고 했던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던, 그 폐쇄적이고 우울했던 제 스무 살을 대신해 지금이라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헤어지면서 우리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제가 말을 건넸습니다.

“고맙다. 미안하고….”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