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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희곡「파수꾼」과 시놉티콘에 관하여

감시, 일방향에서 쌍방향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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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e_fleming, flicker (CC BY-SA)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CCTV가 우리를 감시하는 세상이다. 거리에는 상시 감시용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고 인터넷을 접속해도 우리의 흔적이 남는다. 현실에서는 행적이 감시카메라의 화면으로 리플레이되며, 사이버 세계에서는 로그인 기록과 함께 주고받은 말들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일본에서는 최근 색다른 직업이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생전 사이버 세계에 남겨 둔 생전의 흔적을 정리해주는 것. 현실세계에서야 고인의 유가족이 유품을 정리할 수 있지만 사실 인터넷이나 모바일 상의 흔적은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긴 하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난감하기도 한 일이다. 이미 내 몸은 사라졌지만 내 존재는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의식에서 당분간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락거렸던 또 하나의 현실인 사이버상의 정보세계에서 내 흔적은 얼마나 오래갈까, 생각하면 좀 끔찍하기도 하다. 방부제를 쓰지 않았는데도 내 흔적이 썩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닐 것 아닌가. 망자의 영혼이 어슬렁거리는 어느 사이트의 한 화면을 생각하면 좀 오싹해지기도 한다. 나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지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양치기 소년의 우화, 감시당하는 사회 그려

1970년대에 발표된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은 감시당하는 세상을 상징하는 문학작품으로 자주 언급된다. 유신독재라는 억압적인 정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연극은 어떤 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부정한 세상을 감시하고 이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우화적 수법의 형식이었다. 위키피디아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우화寓話는 ‘동물이나 무정물의 의인화를 통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신비로운 설정으로 사회풍자 및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꾸며낸 짧은 이야기’를 말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리 떼의 습격을 미리 알리기 위해 세 명의 파수꾼이 망루에서 들판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새로 파견된 파수꾼 ‘다’인 소년은 이리 떼가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리 떼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파수꾼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소년은 이리 떼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을의 촌장이 나타나 소년을 설득한다. 촌장은 사실은 이리 떼가 없지만, 이리 떼가 나타난다는 거짓 정보가 때로는 ‘마을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소년은 거듭 따지지만 촌장을 설득하지 못하고 점차 그 거짓말에 동조하게 된다. 소년은 다시금 제자리에서 이리 떼가 나타났다는 신호인 양철북을 두드리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변형해서 반공이라는 안보 논리로 국민을 억압했던 당시의 정권을 비판한다. 언젠가 나타날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인 늑대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그 상황 속에서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 사회를 감시하고, 그 감시를 통해 세상을 통제해 나가야 한다. 때로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 정보를 흘려서 사람들을 긴장하게도 해야 한다. 이때 실제로 늑대가 나타났는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늑대가 나타나 평화로운 당신의 일상과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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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알다시피 연극의 대본이다. 연극은 인간의 삶을 객관적 공간인 무대 위로 끌어올려 관객에게 보여주는 양식이다. 작품을 보는 동안 관객은 극중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삶의 조건이나 세계를 다시금 둘러보면서 이 세상은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연극은 발견의 매개가 된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후반부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보고에 앞장서는 소년 파수꾼을 보면서 관객들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이런 극적 경험을 거치면서 관객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이렇게 인간의 양심을 억누르는 실체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억압적 정치체제가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진정한 소통의 세계로 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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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에서는 몇 번의 거짓말로 그 공포감은 사라지고 양치기 소년은 비난을 받지만, 현실에서는 거짓말이 반복될수록 공포감은 증폭되고 일상화된다. 그때 권력은 일방적인 감시의 시선을 음흉한 혀처럼 사람들에게 드리우며 공포와 두려움을 내면화시킨다.

실체가 없을 때 공포는 극대화된다. 건장한 남성이 전기톱을 들고 사람들을 해치는 영화에서 우리는 핏방울의 낭자한 유혈극을 보게 되지 공포를 보지는 않는다. 역설적으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실체가 없거나, 현실에서 약한 존재일수록 공포는 더욱 배가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여학교에는 괴담이 있을 수 있지만, 남학생들이 득시글거리는 남학교에는 심령으로서의 공포와 괴담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영화에 여자 아이가 나오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현실에서 가장 유약한 존재가 심령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공포를 경험한다. 그런 이유로 여자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이 공포의 소재가 되고, 거울이 나오고, 구두가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이 이룩한 성과와 함께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있는 메시지는 감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필요성이다. 망루에 올라가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감시하는 파수꾼들은 권력자가 사람들을 억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런 구조는 철학자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panopticon을 떠올리게 한다. 파놉티콘은 바깥 쪽에 높고 긴 담이 둘러쳐진 원형의 감옥이다. 감옥 중앙의 이층으로 되어 있는 감시용 탐에서는 수감자들을 감시할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행동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수감자들은 완벽하게 격리될 수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과 수감자들은 촌장과 감시자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권력자인 촌장의 실체를 모르고 있으며,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은 권력을 갖고 있는 감시자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방적인 감시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시놉티콘synopticon’이다.

서로를 감시한다는 점에서 시놉티콘은 ‘파놉티콘’의 반대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토마스 매티슨은 언론과 통신을 통해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는 체제로 발달했다고 주장하면서 권력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파수꾼」이 우리 세대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가능할 때 진정한 소통의 사회가 완성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권력을 견제하는 역감시의 중요성이 반드시 부각되어야 한다’고. 인터넷이든 CCTV이든 우리를 일상을 감시하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역감시가 가능해야 진정한 소통의 시대가 완성되는 것이다.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