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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빗방울의 그림자, 툭툭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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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는 소나기가, 말라있던 이번 여름을 강렬하게 적신다. 휴가를 못 간 대신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나름의 휴식시간을 보낸다. 최근 시인들의 관심은 일상성의 반성과 그로 비롯된 사유를 통해 과거로 혹은, 좀 더 작지만 내밀한 곳으로 향하는 듯하다. 

과거의 시가 큰 깃발 아래로 몇 개의 분대가 헤쳐모이는 지점에 있었다면 최근의 시는 발걸음을 되돌려 헤쳐모이기 전 각자의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다. 방에 들어가서는 묵은 일기장이나 사진첩도 꺼내보고 창틀에 쌓여있는 먼지를 한참 쳐다보곤 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미경을 엿보는 셈이다.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형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 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따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 나희덕, <비에도 그림자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삶의 의미

빗줄기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인식은 공간을 통해 일어난다. 소나기의 시각적 이미지와 빗방울의 촉각적 이미지가 환기하는 것은 비가 피해 간 네모난 사과궤짝의 자리다. 그림자는 우리에게 하나의 좌표로 보여주는 일종의 존재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풍경은 비 또한 우리와 한 세상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일상의 흔한 소재인 ‘비’가 우리 삶의 숨어있는 의미를 환기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소나기가 지니는 직선의 순간성에서 할머니의 둥근 몸을 지나 사각형의 사과 궤짝으로 빗방울은 스며들며 그림자를 남긴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이르는 시선의 이동과 함께 원형과 사각형의 공간구조를 조직화함으로써 이 시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삶의 의미를 세밀하게 표현한다.   

화자는 지금 소나기를 피하고 있다. 화자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과일 행상을 하는 할머니가 앉아 있던 사과궤짝이다. 물이 일으키는 생성의 상징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의 일차적 진술은 소나기가 지난 자리에 사과궤짝 모양의 의자가 ‘고슬고슬한 땅’에 그림자를 남겼다는 것이다. 즉 개별적인 빗방울은 만들 수 없는 그림자를 사과 궤짝 안에 모여들게 함으로써 그림자 덩어리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를 살면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삶의 발견이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비가 피해 들어간 자리’가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와 연계된 시어는 모두 둥근 형상을 지닌다는 사실에서 이 시는 모성의 한 변형으로 읽을 수 있다. 1행부터 4행을 풍경의 제시라는 의미 단락으로 묶으면 시의 후반부인 5행부터 7행에 드러나는 시적 진술들은 둥근 원형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몸과 둥근 자두를 따는 화자는 과일의 형태와 유사하게 둥근 이미지를 가진다. 또 전반부에서 화자는 비를 남성성의 속성과 유사한 ‘소나기’로 인식하던 것에 비해 후반부에서 ‘소나기’는 비로소 할머니의 몸 아래로, 그것도 남몰래 들어감으로써 ‘비’로 인식이 되며 과일들의 둥근 이미지와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포근히 쌓이는 것을 보여준다.

소나기를 통해 읽어내는 모성(母性)의 상상력

아주 짧게 내린 소나기에서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사유와 관찰력은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미 다른 시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이 시 역시 작고 하찮은 사물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읽어내는 시인의 역량을 읽을 수 있다. 일상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하찮을 만큼의 사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야말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현대적 현미경이 아닐까.      

즉물적 상상력을 통해 얻은 시인의 성찰을 나름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부터 흩어져 요란스럽게 지상으로 하강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소나기(남성적 이미지)가 할머니의 둥근 아래 자리(모성의 이미지)로 몰래 스며들면서 고요한 그림자를 획득하는 순간이 모성성의 새로운 한 변형이라는 것이다. 삶이 폭력화, 물신화된 상황에서 할머니의 아래 자리는 우리들의 근원적 그리움이 자리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일 것이다.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땅위)에선.

- 김종삼, <물통>

 

요즘은 물을 사서 마시지만 어릴 때만 해도 물을 사서 마신다는 생각은 정말 낯선 상상이었다. 목마를 때 마시는 한 잔의 물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순간이 또 뭐가 있을까. 이 시는 흔히 지나치기 쉬운 물통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인식을 드러낸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언어로 세계와 인간을 형상화 했던 김종삼 시인의 시세계가 이 작품에도 잘 드러난다. 이 시에서 물은 평화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아울러 물은 영혼의 부드러움을 나타내며 이런 시의 요소들이 묶여 일상적인 ‘물통’을 예술의 언어로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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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를 때 물 한 잔 같은 사람… 여러분은?

1연에서 제기된 현실은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는 단절된 세계이다. 피아노가 아니라 풍금이라고 한 데서 동화적이고 평화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이 세계는 이런 평화가 깨진 비극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이어지는 연에서는 평화가 단절된 현실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물음에 시인은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대답한다. 

마지막 연에서 물통을 길어다주는 시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 듯 보인다. 현실의 고통과 메마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얕은’ 하늘의 ‘영롱한 날빛’이 ‘땅위에’ 있다는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화적이고 평화로운 세계가 깨어진 안타까움을 ‘물’이 고여 있는 ‘물통’을 제시하는 데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 드러난 시이다. 
이 시의 매력은 이 ‘물’을 읽을 때 돋보인다. 이때의 물은 일상의 물일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고통의 현실을 정화하는 물이며, 평화와 대립되는 죽음의 세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물이다.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뭐 하고 살았느냐고. 그럼 그때 우리의 대답은 무엇으로 표현될까. 

빗줄기가 창문에 사선을 그리며 내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똑같은 빗줄기도 누구에게는 직선으로 보이고 누구에게는 사선으로 보인다. 그 차이가 어쩌면 ‘뭐 하고 살았느냐’에 대한 대답은 아닐까.

 

글 | 손인수